망국의 길, 그리고 망명 독립운동과 이석영 패망한 조선의 사대부들 애국·매국 갈림길에 서다
지난 5월 13일 경기일보와 경기연구원이 주최한 광복 70주년 기념 경기도 학술간담회 ‘경기도의 미래를 항일독립운동에서 찾다’가 경기연구원 회의실에서 열렸다.
이날 토론자들은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조선의 패망의 원인과 그 과정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면서까지 국가를 되찾고자 했던 경기도의 독립인물의 재조명 필요성에 대해 강조했다.
김수지 ‘대비, 왕위의 여자’ 저자
정조 개혁정책의 좌절과 망국의 길
정조가 규장각을 설치한 의미는 실력중심으로 관리들을 등용할 것을 표방한다. 누구를 막론하고 고르게 등용하겠다는 원칙은 사실상 노론 벽파들의 정국 주도권을 저지하고 왕권강화책인 탕평을 추진하기 위한 명분이었다.
정조는 신분이 아니라 실력에 따라 인재를 등용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이러한 불합리함을 바로잡을 예정이었다. 이런 계획은 규장각 검서관직에 서얼 출신을 등용하면서 나타난다.
당대 최고의 실력자로 알려져 있었지만 서얼이기 때문에 출사하지 못하고 있었던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 등이 출사한다.
정조의 다음 계획은 국왕의 호위만을 전담하는 장용위를 설치하는 것이었다. 당시 정조는 국왕을 호위하면서 동시에 정권 독점 세력 노론 벽파 척신들과 얽히지 않은 신흥 무반(武班)이 필요했다. 장용영의 군관 중에 서얼과 평민 출신이 많았다는 점이 이를 말해준다.
정조 18년(1794) 1월15일 정조는 수원 화성을 쌓으라고 명한다. 정조는 강제 부역이 아니라 도급제 임금 노동제를 도입해 10년이 걸릴 것으로 예측된 이 일을 불과 28개월만에 마친다.
백성들에게 노동 임금을 지급하자 노동 효율성이 높아지면서 공기를 단축시켰다.
정조의 이런 개혁 정책에 노론 벽파의 격렬한 저항 역시 강도가 점점 더해갔다. 개혁정책에 대한 불만이 정조 앞에서 정면으로 터져 나왔다.
정조의 의문사 후에 등장한 정권들은 왕을 무력화시키고 자기 가문의 이익을 극대화시키기 위한 정치에 몰입했다. 백성들을 위한 개혁정책들은 명색만 유지하거나 폐지되었고 삼정의 문란과 같은 부정부패가 판을 쳤다.
조선은 정조 사후 10년 뒤 순조11년(1811) 평안도의 홍경래의 난을 기점으로 민란의 시대로 접어든다. 이렇게 조선 왕조는 이미 내부적으로 망국의 길로 들어서고 있었다.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고종, 망국 군주가 되기까지
고종은 자신을 국왕으로 만들어준 부친을 버리는 것으로 즉위 10년 만에 정치 전면에 비로소 등장했다. 하지만 실상은 고종의 친정이 아니라 민씨 척족 정권의 집권에 불과했다. 어지러운 정세 속에 매관매직이 성행했고 돈 주고 벼슬을 산 자들은 착취에 골몰할 수밖에 없었다.
고종13년(1876) 1월 특명전권대사 구로다 기요타카(黑田淸隆)가 3척의 군함을 이끌고 강화도에 상륙해 회담을 요구하자 고종은 판중추부사 신헌에게 전권을 주고 일본과 조약 체결에 나서게 했다. 2월3일 신헌과 구로다가 조·일 수호조규(강화도조약)를 체결했다. 고종에 의해 조선은 불평등조약을 체결했다.
고종 재위 당시 개화당은 고종의 밀지를 통해 갑신정변을 일으켰지만 ‘3일 천하’로 끝나고 말았다. 그러자 고종은 자신을 호위해 청군에 넘긴 홍영식·박영교·신복모 등과 사관생도들을 모두 사형시켰다.
동학이 사회개혁을 요구하며 일어났지만 고종은 청나라 군사를 끌어들여 이를 진압하려 했다. 고종의 요청에 따라 청에서 군사를 파병했고 이에 일본도 천진조약에 의거해 즉각 파병했다.
위로부터 개혁인 갑신정변이 진압된 지 10년 만에 아래로부터 개혁인 동학농민혁명도 진압되었다. 결정적 순간에는 항상 개혁의 반대편에 섰던 고종의 행태는 계속 반복되었고, 개혁을 희구하는 민중 세력도 사라져갔다.
이후 아관파천을 단행한 고종은 갑신정변으로 급진 개화파를 제거한 데 이어 온건개화파조차도 제거했다.
고종은 개화를 추진하다가 헌정 체제가 전제왕권에 조금이라도 저해되면 하루아침에 돌변해 모두 무너뜨렸다. 대세에 순응하는 척하다가 틈을 보아 뒤집는 것이 고종 정치의 한 특징이었다.
구미정 숭실대 외래교수
이완용의 비서 이인직과 망국협상
이인직이 1907년 하반기에 혈의루를 연재한 지면은 ‘만세보’였다. 이후 이인직은 경영악화로 폐간한 ‘만세보’를 인수하여 ‘대한신문’을 창간하고 사장에 취임했다.
시설과 사옥을 넘겨받는 데 드는 거금 2만원이라는 자본의 출처는 두말 할 나위도 없이 이완용 내각이다. 이인직은 이완용의 비서로, 또 이완용 내각의 홍보 책임자로 정계에 데뷔하는 꿈을 이룬다.
동경정치학교에 관비유학생으로 있던 이인직이 1903년 7월16일 졸업 이후 귀국을 미루다가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1904년2월22일 일본 육군성 한국어 통역으로 임명되어 제1군사령부에 배속, 종군한 것을 보면 그의 행보가 얼마나 정치적이며 기회주의적인지를 새삼 느끼게 한다.
이인직에게 일본은 ‘성공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였다. 한국이 일본의 ‘보호국’의 지위로 전락한 것이 그에게는 절호의 기회였다.
1910년 8월4일 밤 11시 이인직은 일본어를 할 줄 모르는 이완용을 대신해 통감부 외사국장 고마쓰를 찾아가 문제의 ‘매국협상’을 벌인다.
이인직은 고마쓰에게 ‘역사적 사실에서 보면 일한병합이라는 것은 결국 종주국이었던 중국으로부터 일전(一轉)하여 일본으로 옮기는 것’이라고 말한다. 인조반정 이래 계속 집권당이었던 노론의 합방 당론이 이완용의 하수인인 이인직의 입을 통해 표면화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모습에서 나타난 이인직의 욕망은 ‘반쪽짜리’ 양반이 아닌 진짜 양반으로 ‘행세’하고 싶은 마음에 수렴되지 않나 싶기도 하다.
더불어 이런 그에게 ‘새로운 시대의 선각자’라는 평가가 과연 어울리나 하는 생각이 꼬리를 잇는다. 오히려 그는 시대의 퇴행을 욕망했으며 그 연장선상에서 봉건 질서의 상층부에 포섭되기 위해 어떤 변신도 마다하지 않은 기회주의자였다.
김병기 대한독립운동총사편찬위원장
친일 수작자 76인, 그리고 집단망명
1910년 망국이 기정사실이 된 상황에서 지배층인 양반 사대부들은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의 조류와 이에 저항하는 애국의 조류로 나뉘게 됐다.
그해 10월 일제는 왕족과 조선 사대부 76명에게 작위와 은사금을 내렸다. 모두가 조선이라는 나라를 망하게 하는데 공을 세웠다고 일왕이 내린 것이다.
이용구와 함께 일진회를 주도한 대표적인 친일파 송병준은 일본 수상 가쓰라(桂太郞)을 만나 ‘1억엔에 나라를 팔겠다’라고 흥정을 걸었던 망종(亡種)이다.
송병준의 사위는 구연수는 을미사변에 가담하여 명성황후의 시신에 석유를 뿌려 소각하는 일을 감독하고 일본에 망명하였다가 나라가 망한 후에는 일제에 붙어 경찰 최고위직인 경무관을 지내고 중추원 참의가 되었다. 그 아들이 구용서로 해방 후에 한국은행 총재가 된 인물이다.
민병석은 병합 당시 궁내부대신이었는데 오늘날 대통령 비서실장 격이다. 그는 조선통감 데라우치(寺內正毅)의 사주를 받아 왕실의 병합반대론자를 무마 조정하고 1급 친일파가 되어 훈 1등 자작과 매국공채 10만엔을 받았다. 그의 아들이 해방된 대한민국 땅에서 제5~6대 대법원장을 지낸 민복기다.
당시 애국의 조류에 몸을 실은 사람들도 더 이상 나라를 지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인지한다. 그러나 자신의 몸을 던져 독립운동에 나서면 언젠가는 빼앗긴 나라를 되찾을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다.
그런 믿음으로 대대로 내려오던 집과 전답을 비밀리에 처분하고 가족을 인솔하여 낯선 땅, 동토의 땅 만주로 길을 떠난 이들이 있다. 이건승, 정원하, 홍승헌 등 강화학파의 무리와 이석영, 이회영 등 6형제가 그러했다. 멀리 안동에 사는 혁신유림 김대락, 이상룡과 김동삼이 이들의 망명 집단에 합류했다.
이들이 압록강을 건넌 이유는 만주에 독립운동근거지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독립운동근거지 건설계획은 1907년 조직된 비밀결사 신민회의 주요 목표였다. 만주나 연해주에 교포들의 생활 근거지를 마련하고, 그를 기반으로 무관학교를 설립하는 것이다.
그들이 가지고 간 막대한 자금은 서간도의 삼원포, 합니하, 고산자 등에서 신흥무관학교 토지를 사고 학생들을 무료로 먹이고 입히고 학교를 운영하는데 모두 소비되었다. 하지만 해방 이후 친일세력이 사회의 지도층이 된 상황에서 독립운동에 모든 것을 걸었던 독립투사나 그의 후손들은 우리 사회의 음지에서 신음해야 했다.
허성관 전 장관, 전 광주과기대 총장
이석영 선생의 독립투쟁과 고뇌
영석(潁石) 이석영(李石榮 1855-1934)은 우당(友堂) 이회영(李會榮 1867-1932) 선생의 둘째 형님이다. 이석영 선생은 모두 6형제(건영, 석영, 철영, 회영, 시영, 호영)인데 이중 이회영이 앞장서서 형제들을 설득하여 모두 가산을 처분하여 6형제 50여명의 전 가족이 솔가하여 1910년 12월 빼앗긴 나라를 찾고자 만주로 망명했다.
이석영은 영의정을 지낸 이유원(李裕元, 1814-1888)의 양자로 들어갔다. 이유원은 만석이 넘는 재산을 가지고 있었고 이를 이석영에게 상속하였다. 이석영은 이 재산을 모두 처분하여 독립투쟁에 썼다.
사회 지도층이 솔선수범해서 책임을 다하는 소위 노블리스 오불리주를 실천한 대표적인 사례로 이석영의 행동은 역사에서 높게 평가되어야 한다. 최근에는 이석영이 처분한 재산의 현재가치가 2조원에 달한다는 주장도 있고, 가문에서는 6조 내지 7조원 쯤 될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이석영이 당시 서울 사람이지만 양부 이유원의 근거지는 지금의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이다. 그의 전장도 지금의 양주시와 남양주시 등 일원에 있었다.
그러나 지역 주민들이 자랑스럽게 기려야 할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 지역에서 이석영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이석영에 대해 남아 있는 자료는 모두 한문장 정도에 그치고 있다. 체계적인 연구 자료도 찾아 볼 수 없다.
독립투쟁에서 이석영 선생의 공적은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전 재산을 교민 자치기관인 경학사와 신흥무관학교 설립과 운영에 쾌척한 것이다.
신흥무관학교는 10년에 걸쳐 3천500여명의 독립군 장교를 배출했다. 이들이 일제 강점기 무장 독립투쟁의 핵심이었다. 이석영 선생이 계시지 않았다면 독립군 간성들을 길러낸 신흥무관학교가 세워지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석영은 높게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특히 자신의 재산을 독립투쟁에 바친 대가로 스스로 굶주림 속에서 생을 마감하고, 형제와 자녀와 조카들까지 독립투쟁에 바쳤다. 비록 인생에서는 실패했을지 몰라도 역사에서는 영원히 성공한 삶이다.
글=정진욱기자 사진=추상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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