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겨울과 추위가 서서히 물러가는 느낌이 다가온다. 이때쯤이면 으레 입춘을 거론하며, 봄이 시작된다고 말하곤 한다.
유서 깊은 가문에서는 ‘입춘대길(立春大吉), 건양다경(建陽多慶)’과 같은 입춘첩을 챙기고, 한지에 붓글씨로 써서 출입문 상단 좌우에 붙이기도 한다. 그런데 이렇게 하면서도 여기에 어떤 의미가 담겨 있고, 또한 우리의 전통명절인 설날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를 설명을 아직 듣지 못해, 부족하나마 필자의 생각을 적어보고자 한다.
우리는 근세에 한·중·일 동양 삼국이 서양의 세력에 밀려 개항을 하고, 과학과 기술, 경제와 정치 등의 각 분야에서 뒤처진 것을 보고 서양에 열세가 지속됐던 것으로 이해하는 것 같다. 그러나 과거에는 대체로 서양에 비해 동양의 과학이나 사상, 군사력이 앞서 있었다. 인류의 3대 발명품이라는 종이, 화약, 나침반이 동양에서 발명됐고, 세계 3대 종교인 기독교, 이슬람교와 불교도 동양에서 시작됐다.
마찬가지로 태양력이나 태음력을 정하는 천문학도 서양보다 동양에서 먼저 발달한 분야다. 우리가 가진 신라의 첨성대나 조선 초기의 천상열차분야지도 등은 당시의 서구에서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현재 우리가 쓰는 달력이 서양에서 제정된 그레고리력인 것은 역설이다.
동양이나 서양 모두 1년이 365일인 것은 일찍이 알았지만, 동양에서는 군주가 하늘에서 선택받았다는 천명사상에 따라 일찍부터 천문대를 설치해 관측하고 시간의 기준을 정하는 데 앞장섰다. 이에 따라 1년 주기가 365일인 것을 알아내고, 이를 24로 등분한 24절기를 두었다.
24절기 가운데 첫째 절기의 명칭이 바로 입춘이고, 새해의 시작이자 봄의 시작을 의미한다. 따라서 옛날에 양력설이 있었다면 입춘일이 바로 양력설이고, 새해의 첫날인 설날과 새봄이 시작되었음을 기념하기 위하여 입춘첩을 만들어 붙였다.
그 양력 설날을 기념한 입춘첩 문구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이 바로 앞에 말한 것이다. 이는 숙종 임금이 입춘일을 맞아 당시 유명한 정치가였던 미수 허목 선생에게 좋은 글귀를 청하자 바로 입춘대길이라고 지었고, 이어서 청을 받은 우암 송시열 선생이 건양다경이라고 지었다 한다. 새해, 새봄에 크게 길한 일이 많기를 기원하는 뜻이고, 양의 계절이 시작되니 경사가 많기를 바라는 뜻이다.
우리 선조들은 태양력의 1년 주기가 365일이고, 태음력의 1년 주기가 354일인 것을 알고, 농경시대의 기간산업인 농업이 시기를 잃지 않도록 지금의 양력에 해당하는 절기를 썼다. 그렇지만 인쇄술과 정보전파가 오늘날과 달랐던 당시에 일반 민중은 이런 정보를 접하기 어려워 부득이 태음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전통이 수천 년 지속된 결과로 1895년에 고종 임금이 태양력을 국가표준으로 반포했지만, 지금도 여전히 설이나 추석 등의 명절행사와 제사 등의 풍습은 전통대로 행해지고 있는 실정이다. 좀 더 살펴보면 국가기념일과 성탄일은 태양력으로, 명절과 석가탄일은 태음력으로 쇠고 있다. 즉 태양력과 태음력이 혼용하여 사용하고 있는 상황이다.
지금의 우리를 돌아보면 50년 전, 100년 전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우리의 생각과 생활이 확연히 달라졌다. 과거 농경시대에 기초한 의식주와 출산과 결혼, 장례 등의 생활양식은 물론이고 정치와 경제 등의 모든 분야에서 의식과 제도가 현격히 달라진 오늘날에, 전통의 취지와 정신은 살려가되 그간의 변화에 맞는 변용을 모색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양봉환 중소기업기술원장
로그인 후 이용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