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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봉 칼럼] 이상봉의 삶, 디자이너로 살아간다는 것
오피니언 이상봉 칼럼

[이상봉 칼럼] 이상봉의 삶, 디자이너로 살아간다는 것

이상봉이란 브랜드가 이제 내년이면 30년이 된다. 그 세월 동안 나는 집시 같은 삶을 살아왔다. 서울은 물론이고 파리와 뉴욕, 런던, 아프리카, 남미 등 전 세계를 다니면서 패션으로 세상과 소통했다. 바람처럼 물처럼 자유로운 영혼을 가지기를 원했고, 나는 불같은 열정을 닮고 싶었다.

나는 어린 시절 평범했지만 꿈 많은 소년이었다. 중학교 때는 오페라 가수를 꿈꾸었고, 고등학교 때는 글쟁이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대학에서 연극을 처음 본 후 나의 꿈이 바뀌었고 연극의 열정적인 에너지는 나에게 마치 운명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군 복무 중 아버지의 죽음과 가장으로서의 책임감 때문에 나는 연극을 포기하고 생계 수단으로 패션을 선택했다. 우연히 신문 광고를 보고 찾아간 복장학원에서 바느질부터 배우기 시작했고, 아들이 바느질하는 모습을 보고 눈물 흘리시던 어머니를 잊을 수가 없었다.

그 어머니가 올해 초에 돌아가셨다. 뉴욕 컬렉션을 마치자마자 한국으로부터 어머니의 부음을 듣게 되었고 결국 나는 어머니의 임종을 함께 하지 못한 불효자가 되고 말았다. 2009년 파리 컬렉션 때도 여동생이 갑자기 세상을 떠났지만 일정 때문에 장례식장에만 들르고 발인에도 참석하지 못했었다. 집시같은 삶을 살아야 하는 패션 디자이너의 삶에 비행기 안에서 나는 속으로 한없이 울었다.

뉴욕으로 떠나 링컨 센터에서 2015 봄/여름 이상봉 컬렉션을 가졌다. 이번 패션쇼는 나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디자이너를 꿈꾸던 소년에게서 영감을 받은 패션쇼였기 때문이다.

불의의 사고로 꿈을 채 피워보지 못하고 유명을 달리한 소년의 스케치를 보고 옷을 만들면서 꿈에 대해 다시 생각했다. 결국 그 영감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드림 로드’라는 하늘가는 길이 패션쇼 테마가 되었다. 패션을 통해 아픔도 고통도 꿈으로 승화시키고 싶었다.

1년에 2 번씩 치르는 홍역을 벌써 2002년부터 13년째 치르고 있다. 뉴욕에서 300명에 가까운 모델 오디션을 시작으로 스타일리스트와 새로운 룩을 만들고 헤어, 메이크업, 음악, 촬영, 인터뷰 등 하루 24시간이 수없이 쪼개진다. 이번에는 뉴욕 매장 오픈 건으로 인한 인테리어 미팅까지 이어지는 쉴 틈 없는 여정으로 인해 시차조차 들어올 틈이 없다.

뉴욕에서 돌아와서는 바로 인천으로 달려갔다, 이번 2014 인천 아시안 게임 전야제 패션쇼를 열어야 했기 때문이다. 개막식을 위한 한류 스타 김수현과 장동건의 의상과 뮤지컬 배우들의 한글이 들어간 의상을 제작하고, 전야제 패션쇼에서는 한글과 단청, 창살문양 등 우리의 전통적인 요소를 패션에 접목한 의상을 선보였다. 그리고 다음날 새벽 중국 천진에서 초청받은 패션쇼를 치르기 위해 비행기에 올랐다.

천진의 고층 호텔에서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강은, 패션 디자이너로 산다는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했다. 패션쇼의 긴장감은 이방인을 감싸는 안개 속에 묻혀 버리고, 오랜만에 어깨 힘을 빼고 멍하게 있었다. 그렇게 천진에서의 패션쇼가 끝내고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동대문 DDP에서 열린 이번 서울패션위크는 나에게 가장 중요하고 의미있는 행사였다. 서울 패션 위크가 끝나갈 즈음 가을비가 축적추적 내렸다. 나는 잠시나마 진한 커피 향에 취해본다. 뜨거웠던 6일간의 K-패션의 열기도 어느새 가을 빗속으로 사라져 갔지만 패션에 대한 열정은 여전히 뜨겁다.

디자이너는 1년을 앞서서 살아가야 한다. 많은 디자이너들이 뿜어내는 창조적인 열기와 컬렉션 장을 오가는 패션 피플들을 바라보는 즐거움을 뒤로 하고 나는 다시 일상적인 디자이너로 돌아가서 2015 가을/겨울 위한 새로운 작업에 들어가야 한다.

새로운 패션에 대한 나의 열정이 뜨거운 만큼이나 직원들의 고통과 희생도 클 것이다. 그래서 직원들에게 늘 미안하고 고맙다. 서울을 떠나며 우리 직원들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남긴다.

이상봉 디자이너(한국패션디자이너연합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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