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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완상 칼럼] 선제적 사랑과 폭력
오피니언 한완상 칼럼

[한완상 칼럼] 선제적 사랑과 폭력

57년 전 이승만 대통령이 직접 참관하는 군사 훈련에 차출되어 한 달 이상 참으로 고된 훈련을 받았다. 훈련을 끝내고 소대로 돌아오니 잠시 고향에 돌아온듯 한 여유를 느꼈다. 첫 일요일 아침에 사단 교회예배에 참석할 사병들은 중대 연병장에 모이라고 알려왔다. 너무 반가워 막 나가려고 하는데 등 뒤에서 선임 사병이 거칠게 나를 불렀다.

“어이 한 일병. 변소 청소해야지 무슨 교회가려고해…”

나는 속으로 ‘헌법이 보장하는 신성한 종교 자유를 일개 선임 사병이 감히 빼앗다니…’하고 뇌이면서 교회로 향했다. 갔다오니, 선임 사병은 얼굴을 붉히며 화를 냈다. 무슨 연유인지 몰라도 세 명의 졸병들이 나와 함께 기합을 받게 되었다. 변소 앞에서 선임 사병은 오른쪽부터 거칠게 곡괭이 자루로 때리기 시작했다. 맞는 졸병들은 죽는 소리를 질러댔다.

제일 끝에 서 있던 나는 세 명의 비명 소리에 겁에 질려있었다. 마침내 내 차례가 왔다. 내 왼쪽 어깻죽지 위에 곡괭이 자루가 내리 찍었다. 얼얼했으나 예상보다 덜 아프다고 느꼈다. 겨울 솜틀 옷이 비록 다 해진 것이지만, 그 덕을 본 셈이다. 허나 졸병들의 엄살 탓이기도 했다. 과도한 엄살은 약자들의 생존 기술이다. 그것이 폭행자의 자존심을 떠받쳐 준 듯 했다.

그런데 나는 엄살을 떨 수 없었다. 자존심 탓이리라. 아프긴 했으나 견딜만하다고 느꼈기에 나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바로 그 순간, 나는 폭행자의 악을 보았다.

“너희들 셋은 꺼지라.”고 소리 지른 후 나에게 이를 갈 듯 대들었다.

“이 새끼 웃어, 대학 다녔다고…”

그의 곡괭이 자루는 내 상체 곳곳에 거칠게 떨어졌다. 나는 어금니를 굳게 물고 끝내 엄살은 부리지 않았다. 그는 분이 덜 풀렸는지 밤늦게 다시 보자고 했다. 영하 20도의 겨울밤 10시경에 나는 시베리아 칼바람이 매섭게 몰아치는 언덕에서 맨몸으로 그 바람을 맞고 서있었다. 엎드려뻗쳐 500번을 하라고 명령했다. 그날 밤 나는 참으로 소중한 진실을 깨달았다.

폭력은 강한 자의 덕목이 결코 아니라는 진실, 폭력으로 남을 굴복시키려는 자는 가장 연약한 자라는 진실을 깨달았다. 그때부터 오늘까지 나는 폭력세력이 제일 두려워하는 것이 바로 비폭력적 우아한 저항임을 잊지 않고 있다.

지금 이라크의 모슬 지역에는 폭력과 폭력이 발악하면서 숱한 억울한 주검들이 널브러지고 있다. 그곳에 신선한 바람이 일고 있다. 심장병을 앓고 있는 어린이들을 종파를 떠나 수술해주는 인도주의 단체가 있다. 그 이름도 흥미롭다. 선제적 사랑 연대(Preemptive Love Coalition)이다. 그들은 수니파든, 시아파든, 기독교인이든 가리지 않고 심장병으로 죽어가는 어린이들을 치료해주고 있다.

얼마 전 천 번째 수술을 했다. 참으로 의미있게 흥미로운 것은 폭력세력들이 바로 이 선제적 사랑 실천을 제일 무서워한다고 한다. 미국 정부의 강력한 폭격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다. 미국을 위시한 국제적 강경대응은 오히려 그들로 하여금 폭력적 저항을 지속시킬 명분을 제공하면서 신참자를 충원시키는데도 도움을 주는데 반하여, 선제적 사랑 실천은 그들을 무력화시킨다고 한다.

그렇다. 화해, 용서, 사랑의 선제적 실천은 항상 폭력적 악행을 원천적으로 위협한다. 그래서 예수가 이천 년 전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겠나. 선제적 원수 사랑만이 원수를 사라지게 한다는 진리야말로 남북대결 70년을 눈앞에 두고 있는 우리가 새삼 되새겨 보아야 할 진리가 아닌가!

한완상 前 교육부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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