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성벽길 한켠엔… 수백명 천주교 신자들의 아픈 역사가
교황 프란치스코가 8월 한국을 방문한다. 교황의 이번 방한은 지난 1984년과 1989년 요한 바오로 2세의 방한에 이어 역대 세 번째다. 교황의 방한으로 가톨릭교회는 물론이고 온 나라가 들썩이고 있다.
오는 8월 14일~18일까지 4박5일간의 사목 일정은 아시아 청년대회,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시복식, 그리고 한반도와 세계 평화를 기원하는 ‘평화와 화해를 위한 미사’를 중심으로 진행된다. 특히 교황은 방한 중 여객선 세월호 참사 희생자 가족들을 만나 위로하고 장애인들을 격려하며, 평신도 및 수도자들, 한국 이웃종교 대표들과도 대화 시간을 갖는다.
방한 일정 중에 8월 16일 오전 10시, 서울 광화문 앞에서 열리는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시복식은 이례적으로 교황청이 아닌 지역교회 현지에서 교황이 주례하는 장으로 더욱 관심을 모은다. 이번 시복식을 통해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는 복자(福者)로 선포된다. 복자는 가톨릭교회에서 죽은 사람의 성덕(聖德)을 증거해 부르는 존칭 중 하나이다.
이에 따라 이번 시복식은 한국 평신도들의 모범을 널리 알리고, 전 세계 신자들이 한국 순교자들을 구체적인 신앙의 모범으로 공경할 수 있도록 이끄는 견인차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를 모은다.
프란치스코 교황 방문을 앞두고 우리가 관심가져야 할 곳이 있다. 바로 남한산성 순교성지(경기도 광주시 중부면)다.
지난 6월 22일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남한산성은 약 1천400년 동안 산성과 도시의 기능을 함께 수행한 소중한 문화유산이 아닌가. 그렇다면 남한산성 안에 순교성지가 왜 소재하고 있는 것일까? 도대체 천주교와 남한산성은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7월 3일 오후 남한산성 순교성지(전담 박경민 베네딕토 신부)를 둘러봤다.
■ 최초의 박해, 신해박해(1791년) 때부터 남한산성에서 300여명 순교
남한산성은 ‘종교의 보고’다. 특히 천주교와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곳이다.
남한산성은 신유, 기해, 병인박해를 통해 300여명의 순교자가 탄생한 곳으로 한강이남 경기지역 교우들에게는 ‘잊을 수 없는 순교터’다. 그렇다면 천주교와 전혀 관계가 없어 보이는 남한산성이 왜 천주교의 성지가 되었을까?
한마디로 정리하면, 남한산성에 광주부의 치소(治所, 어떤 지역의 행정 사무를 맡아보는 기관이 있는 곳)가 되고 나아가 광주가 부윤으로 승격되고 1695년(숙종 21년)부터 토포사를 겸하면서 형장의 장소가 되었기 때문이다.
토포사는 반역도당들을 토벌하고 떼강도와 같은 큰 도적을 잡는 일을 직임하는 관리였다. 남한산성의 토포사는 광주 고을의 치안을 맡으면서 동쪽으로는 양근의 용진, 서쪽으로는 안산의 성곶이, 북쪽으로는 한강, 남쪽으로는 이천, 여주, 양지, 용인에 이르는 고을 안에서 강도나 역도들을 섬멸하는 역할을 했는데, 천주교 박해령이 내려지면 토포군관들은 위의 지역으로 나가 천주교 교우들을 잡았던 것이다.
광주 토포사가 관할 광주에는 1784년 공식적으로 교회가 이 땅에 출범하기에 앞서 천주 신앙에 관심 있는 학자들이 모였던 천지암을 비롯해 교회가 창설되면서 신앙운동이 우선적으로 전개됐던 곳이다.
교회의 선구자 이벽(李檗)으로부터 세례를 받고 신앙운동에 나선 권일신(權日身)은 광주, 양근 일대에 신앙공동체를 조성했고, 정약종과 정약용은 마재(남양주)에 공동체를 조성했는데 이 같은 공동체는 박해에 따라 토포사의 표적이 됐다.
이처럼 광주 유수의 치소가 이전되고 포도청과 여러 관청이 자리하게 되면서 남한산성은 천주교 박해와 밀접한 관련을 맺게 됐다. 포도청에서 인력이 모자라면 군인들이 무술을 연마하던 연무관에서까지 천주교 신자를 심문할 정도였다.
이미 최초의 박해인 신해박해(1791년) 때부터 교우들이 남한산성에 투옥됐고 신유박해(1801년) 때에는 최초로 순교자가 탄생했다. 이어 기해박해(1839년)와 병인박해(1866년) 후기에 이르기까지 70년간 300여명의 천주교 교우들이 순교했다. 그 중 현재 이름과 행적이 알려진 순교자는 총 36명이다.
■ 남한산성에서 처음 순교한 한덕운…8월 16일 프란치스코 교황 주례로 시복식
경기도 광주 지역은 천주교 신앙이 가장 일찍 전파된 지역 가운데 하나였다. 한국 천주교회를 창설한 주역, 이벽(李檗, 1754~1785)이 경기도 광주 출신이었고, 1784년 겨울, 거행된 최초의 영세식에서 이승훈(李承薰, 1756~1801)에게 세례를 받은 정약용의 고향도 광주 마재(현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였기 때문이다.
남한산성이 천주교 신자들의 순교터로 기록되기 시작한 것은 1801년의 신유박해(辛酉迫害) 때부터였다. 이 같은 순교터로서의 의미는 이후 기해박해와 병인박해를 거치면서 박해 기간 내내 끊이지 않았다.
1801년(순조 1)에 있었던 천주교에 대한 탄압, 신유박해는 겨우 터전을 잡기 시작한 한국 천주교회에 시련을 안겨주었다. 중국 출신의 주문모 신부가 순교했고, 대부분의 지도층 신자들도 희생됐기 때문이다.
당시 조정에서는 ‘해읍정법(該邑正法)’, 즉 모든 신자들을 거주지로 압송해 처형함으로써 그곳 백성들에게 경각심을 주도록 하라는 영을 내렸다. 이에 따라 박해 기간 동안 경기도 양근과 여주 등지에서는 끊임없이 천주교 신자들이 처형됐다.
박해가 끝나갈 무렵에는 광주 남한산성에서도 한 신자가 처형을 당했다. 바로 광주 의일리(현 의왕시)에 살던 한덕운(韓德運, 토마스, 1752~1802)이다.
1752년 충청도 홍주에서 태어난 한덕운은 1790년 윤지충을 통해서 교리를 배웠다. 윤지충이 신해년(辛亥年) 박해로 순교하자 신앙 생활을 위해 고향을 떠나 경기도 광주로 이주했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한덕운은 교회의 동정을 살펴볼 목적으로 사기그릇 행상인으로 변장하고 서울로 상경해 순교자의 시신을 거두어 장례를 치루었다. 이런 사실이 발각돼 체포됐고, 남한산성으로 압송돼 동문 밖에서 1801년 12월 27일(양력, 1802년 1월 30일)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당시 그의 나이 50세였다.
한덕운은 형장으로 끌려갈 때, 망나니를 똑바르면서도 잔잔한 눈길로 쳐다보면서 “한칼에 내 머리를 베어 주시오.”라고 말했다. 그러자 망나니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떨면서 헛칼질을 했다. 한덕운은 그를 나무라며 두번째로 명했다. 망나니는 이번에도 헛칼질을 했고, 결국 세 번째 내려쳐서야 그의 머리가 떨어졌다.
그리고 1839년 기해박해에는 새로운 교우촌으로 성장한 구산의 김만집, 김문집, 김주집과 그의 아들들이 체포됐고, 1866년 병인박해 때에는 구산의 김성희, 김차의, 김경희, 김윤희, 최지현, 심칠여와 서문 밖의 홍희만, 홍학주, 이천 단대의 정은 등 40여 명의 교우들이 체포돼 온갖 고문을 받으며 끝내 신앙을 증거 하다가 순교했다.
이렇게 신앙을 지키던 천주교 신자들은 시체가 돼 남한산성 동문 옆 작은 문을 통해 버려졌다. 사람들이 통행하는 일반적인 문을 이용하면 불길하다는 이유에서였다. 원래 이름은 ‘동암문’이나 시신이 버려진 곳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 작은 문을 ‘시구문(屍軀門)’이라고 불렀다.
신유박해 당시 남한산성에서 처음으로 순교한 한덕운의 시복식이 프란치스코 교황 주례로 8월 16일 서울 광화문 앞에서 거행된다.
남한산성 순교성지 박경민 베네딕토 전담신부는 “2000년의 유구한 역사를 지닌 이스라엘 마사다는 2001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고대 유적지으로 불굴의 독립정신을 상징하는 민족 성지가 됐다”며 “남한산성의 경우 잊을 수 없는 순교터이면서, 잊어서는 안 되는 성지로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기점으로 학생들의 역사의식 교육의 장으로 활용되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구불구불 남한산성의 성벽길따라 수백여 명의 천주교 신자들이 피를 흘렸던 아픈 역사가 서려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세계유산등재를 기점으로 성곽 안에서 새로운 삶을 추구한 사람들의 외침을 잊지 않아야 한다.
강현숙기자 mom1209@kyeonggi.com
사진_추상철기자 scchoo@kyeong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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