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 세계를 품다] 2. 17세기 ‘국제 전장(戰場)’ 남한산성
남한산성은 삼국시대부터 유구한 역사에 걸친 우리 선조들의 성곽 축성기술 발달사의 표본이자, 조선시대에는 수어청의 근거지인 동시에 광주 읍치를 담당한 군사행정도시로서 비상시에는 한양 도성의 보장처로서 그 역할을 담당했다.
이러한 가치를 인정받아 2010년 1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잠정목록에 등재됐고, 2011년 2월 국내 잠정목록 유산 중 최우선 등재 추진지로 결정된 바 있다. 그 후 3년여 만인 2014년 6월 22일, 드디어 남한산성이 세계유산으로 등재됐다.
이러한 남한산성을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건은 아마도 ‘병자호란(丙子胡亂)’일 것이다.
1636년 만주족의 청(淸)이 조선을 침략했다. 국왕 인조와 조선 조정은 남한산성으로 피신했고 혹독한 추위와 굶주림 속에서도 결사적으로 항전했다.
그 와중에 조선 신료들은 명(明)에 대한 의리와 조선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오랑캐’ 청에 맞서 끝까지 항전할 것을 주장했던 ‘척화파(斥和派)’와 청의 요구를 받아들이고 후일을 도모해야 한다는 ‘주화파(主和派)’로 나뉘어 치열한 논쟁을 이어갔다. 허나, 포위된 상황에서 시간이 갈수록 식량은 부족하고 추위는 더 심해지는 데다 외부의 구원병마저 차단되면서 조선은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상황에 처해졌다.
한마디로 남한산성의 분위기는 수습이 불가능한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다. 급기야 인조와 조선 조정이 최후의 보루로 여겼던 강화도마저 함락됐다는 소식이 들려온 후 산성의 저항 분위기는 결정적으로 꺾이고 말았다. 인조는 결국 신복하라는 청의 요구를 받아들이기로 하고 산성의 서문을 나와 삼전도(三田渡, 서울 송파구 삼전동에 있던 한강 상류의 나루)로 가서 청 태종에서 세 번 큰절을 올리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치욕적인 항복을 하고 말았다.
이 정도가 한국인이 ‘대략적’으로 알고 있는 남한산성과 병자호란의 기본 스토리이자, 가장 ‘대중적’으로 알려진 내용일 것이다.
그래서 ‘남한산성=치욕’이라는 불편한 등식이 성립돼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병자호란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참혹하고 끔찍한 전쟁이었다. 특히 청군에게 붙잡힌 포로들이 겪어야 했던 고통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병자호란 무렵 청군에게 붙잡힌 조선인 포로는 수십만을 헤아렸다. 이 같은 끔찍한 ‘과거’를 다시 끄집어내는 것이 부담스러웠던 것일까? 해방 이후 한국의 역사학계는 병자호란을 정면에서 다루는 것을 기피해 온 경향이 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역사학계는 연구 자체를 꺼려했다. 하지만 남한산성을 주 무대로 전개됐던 병자호란은 ‘항복’, ‘치욕’이라는 단어로 간단하게 정리되는 것 이상의 복잡한 국제적인 의미를 갖는 사건이었다.
■ 17세기 ‘역사적 거점’ㆍ‘국제적 전장(戰場)’이자 ‘문제적 장소’였던 남한산성
병자호란 당시 항전의 중심지였던 남한산성은 ‘민족 항전의 성지’의 의미를 넘어 당시 국제관계와 관련해 매주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는 장소였다.
한명기 명지대학교 사학과 교수는 병자호란 시기 남한산성 항전의 국제관계사적 의미에 대해 ‘남한산성 연구총서(제1권)’에서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15세기 이후 명 중심의 중화적 세계질서에 순응해 왔던 조선에게 ‘오랑캐’ 출신 누르하치가 후금국을, 홍타이지가 청 제국을 건국한 것은 충격을 넘어 ‘천지가 뒤바뀌는 파천황(破天荒)의 현실’이었다.
조선은 1627년 정묘호란 당시 후금과 ‘형제관계’를 맺었지만 그것은 ‘오랑캐와 마지못해 맺은 내키지 않는 미봉책’에 불과했다. ‘내키지 않으니’ 이후 후금과의 관계는 삐걱거릴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조선이 ‘상국’이자 ‘임금’, ‘부모국’으로 섬기는 명과 조선의 ‘형’이었던 후금 사이의 대결이 지속되자 조선의 입지는 날이 갈수록 어려워질 수밖에 없었다.
1633년 ‘차선’을 둘러싸고 조명금(朝明金) 삼국이 벌인 갈등과 우여곡절은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병자호란의 발생은 어쩌면 필연적인 것이었다. 조선이 청이 칭제하는 거부하고 의연히 명 중심의 질서를 고수하려 시도하면서 병자호란이 발생했거니와 조선 조정이 농성하고, 청군이 포위했던 남한산성은 ‘기존 세계질서’와 ‘새롭게 재편되는 세계질서’가 날카롭게 맞부딪히는 현장이었다.
또 내부의 조선 신료들 사이에서도 척화-주화 논쟁이 지속되면서 남한산성은 안팎으로 세계를 둘러싼 대립의 장소가 되었다. 조선이 결국 청에 항복하게 되면서 남한산성은 국제질서와 역학 관계 변화의 여파가 바깥으로 뻗어나가는 진원(震源)이 되었다. 명에게 조선의 항복은 ‘마지막 후원자’의 소멸을 의미했다.
그 여파는 곧바로 가도를 거쳐 요동을 지나 산해관을 통과하여 북경으로 미쳤다. 요컨대 17세기 초반의 남한산성은 동아시아의 세계질서와 조선 사람들의 세계인식이-격렬한 논쟁과 첨예한 갈등을 거치면서-바뀌고 변하게 되는 ‘역사적 거점’이자 ‘문제적 장소’였던 것이다.”
이처럼 남한산성은 단순하게 인조가 피신했던 곳이 아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인조의 치욕적인 항례(降禮)가 아닌 인조의 이마에서 철철 흘러내렸다고 하는 피를 기억해야 한다. 조선이 청에게 굴복해 항복하는 상황은 결코 조선과 청만의 문제일 수 없었다.
명과 일본, 심지어 몽골까지도 남한산성을 예의 주시할 수밖에 없는 필연성이 존재하고 있었던 셈이다. 세월이 흘러 흘러 이런 안타까운 역사를 배경으로 남한산성이 세계유산이 됐다. 이제는 병자호란을 한중일을 아우르는 대외관계사의 관점에서 이해하고 그 중심지였던 남한산성의 가치를 제대로 인식해야 하는 시기가 왔다.
그렇다면 유네스코는 왜 남한산성을 세계유산에 등재했을까? 세계유산은 탁월한 보편적 가치(OUV: Outstanding Universal Value)를 갖고 있는 부동산 유산이 대상이다. 세계유산위원회는 이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평가하기 위해 10가지 평가기준을 갖고 있다. 문화유산은 이중 어느 한 가지를 충족해야 한다.
이코모스(ICOMOSㆍ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는 보고서에서 남한산성이 ‘오랜 시간 동안 또는 세계의 어떤 문화지역 안에서 일어난 건축, 기술, 기념비적 예술, 도시계획 또는 조경설계의 발전에 관한 인간적 가치의 중요한 교류를 보여주어야 한다’는 등재기준 2(ⅱ)와 ‘인류역사의 중요한 단계를 잘 보여주는 건조물의 유형, 건축적 또는 기술적 총체, 또는 경관의 탁월한 사례이어야 한다.’는 등재기준 4(ⅳ)를 충족한다고 평가했다.
이코모스는 남한산성이 △동아시아지역의 무기발달과 축성술이 상호 교류한 군사유산이며 조선의 자주·독립의 수호를 위해 유사시 임시수도로 축조된 유일한 산성도시인 점 △자연지형을 활용해 성곽과 방어시설을 구축함으로써 7세기부터 19세기에 이르는 축성술의 시대별 발달 단계를 잘 나타내고 있다는 점을 들어 세계유산적 가치가 있다고 평가했다.
남한산성에는 몸을 숨겨 총이나 활을 쏠 수 있는 여장(女墻)과 총을 쏠 수 있도록 뚫어놓은 구멍인 총안, 포를 쏠 수 있는 포루가 존재한다. 초기 성벽만 있던 형태에서 무기 발달에 따라 성의 형태가 변화한 것이다.
남한산성의 구성을 살펴보면 중앙에 행궁이 있으며 좌측에는 종묘에 해당하는 좌전, 우측에는 사직단에 해당하는 우실이 있다. 주변은 성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성문이 있다. 중국 역대왕조의 수도 건설 원리였던 주나라의 문서 ‘주례동관고공기(周禮冬官考工記)’를 따른 것이다. 이코모스는 이 같은 증거가 인간적 가치의 교류를 강조한 등재기준 2(ⅱ)를 충족한다고 평가했다.
또한 남한산성에는 7세기 통일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 인조, 숙종, 영조, 정조 등 각 시대별 성벽의 흔적이 모두 남아있어 시대별 축성술의 발달을 한 눈에 볼 수 있다. 이는 인류역사의 단계를 보여줘야 한다는 등재기준 4(ⅳ)를 충족시키는 요건이다.
이밖에도 이코모스는 △완전성 측면에서 세계유산적 가치를 반영하는 유산이 잘 남아있고 효과적인 법적 보호체계와 남한산성문화관광사업단이라는 단일 민간 전담기구를 통해 보존 관리되고 있다는 점 △진정성 측면에서는 남한산성의 형태와 디자인, 재료와 구성물질, 용도와 기능을 비롯해 역사적 구성 요소가 삼국사기 등 다양한 사료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다는 점도 높이 평가했다.
‘상처’로 점철된 남한산성은 고통스런 역사를 품어오다 드디어 세계적으로 가장 권위 있는 국제기구로부터 인정받게 됐다. 세계적으로 단 하나밖에 없는 가장 가치 있는 유적지로 공인된 만큼 이제는 남한산성의 상처를 보듬어 주고 남한산성의 앞날을 응원해주는 일에 집중해야 한다.
강현숙기자 mom1209@kyeong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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