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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훈의 도시이야기] 상상하기 힘든 도시입지(1)-고대도시 페트라
오피니언 김영훈의 도시이야기

[김영훈의 도시이야기] 상상하기 힘든 도시입지(1)-고대도시 페트라

일반적으로 도시라는 것은 먹고살기 편한 곳에 이루어지게 마련이었다. 수많은 선사시대나 고대도시들이 저마다 강을 끼고 있거나 넓은 평야를 옆에 두고 있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이른바 젖과 꿀이 흐르는 명당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이 같은 입지가 많을 리는 만무하였다. 평야나 강을 끼고 있지 못한 나라나 도시들은 어쩔 수 없이 사막이나 바위산을 가릴 것 없이 둥지를 틀 수밖에 없었다. 힘이 약할수록, 약탈당할 재산이 많을수록 그들은 적이 침입하기 힘든 점점 더 깊고 높은 곳을 찾을 수밖에 없었으며 그러다보니 간혹은 어떻게 이런 곳에 집을 짓고 마을을 만들며 도시를 건설했을까하는 의문이 드는 곳도 나타나게 된다.

그 가운데 독보적인 존재가 바로 페트라(Petra)라는 고대 도시이다. 페트라는 유목생활을 하던 나바테아인(Nabataean)이 BC 7세기 무렵 건설한 고대 대상(隊商) 도시로 이집트, 아라비아, 페니키아 등의 교차 지점에 위치하였으며 선사시대부터 사막의 대상로를 지배하여 번영을 누리면서 이른바 나바테아 문명을 꽃피우고 있었다. 나바테아 왕국의 수도였던 페트라는 중계무역으로 돈도 많았을 것이며 사람들도 부유한 생활을 했을 법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을 지켜줄 철통같은 요새가 필요했다. 군사력으로 강성한 도시가 아니라 상업적으로 부를 축적한 도시였기 때문에 더 그랬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사막 한가운데에 있는 붉은 사암 덩어리로 이루어진 해발 950m의 거대한 바위산 틈새에 도시를 건설하기 시작하였다. 이로써 그리스어로 바위를 뜻하는 페트라라는 도시가 완성되었다.

페트라는 시크(siq)라는 좁고 긴 바위 협곡을 지나가야만 도달할 수 있는 곳이었다. 마치 복잡한 개미굴 입구를 연상시키는 듯 좁고 구불구불한 길이 1.2㎞의 이 시크는 그야말로 페트라의 안전장치이자 그들이 살아가기 위한 물자나 수로가 통과하는 길목이기도 하였다. 이곳만 막아버리면 그 누구도 페트라를 들어올 수 없었기 때문이다.

페트라의 가장 상징적인 건물인 알 카즈네 신전은 6개의 원형 기둥이 떠받히는 2층의 화려한 헬레니즘 양식을 보이고 있으며 그 규모도 너비 30m, 높이 43m의 거대함을 자랑하고 있다. 사암이라 가능했을 터이지만 그렇다 해도 10층 이상의 건축물을 바위를 파서 만들었다는 사실과 정교한 조각이나 화려한 디자인의 헬레니즘이 이 삭막한 곳에서까지 화려하게 꽃피우고 있었다는 사실은 인간과 문화라는 존재의 무한 잠재력을 보여주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

시크라는 천혜의 요새 덕에 수많은 외침을 막아왔던 페트라는 106년 막강한 로마 트라야누스 황제의 군대에게 몰락하게 된다. 시크를 통과할 수 없었던 로마군들이 페트라의 수로를 차단하자 더 이상 저항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후 6세기경 발생한 지진에 의해 도시 전체가 흙으로 묻혀 있다가 1812년 탐험가 부르크하르트가 재발견할 때까지 이 기상천외한 입지는 고스란히 보존되고 있었다. 아마도 페트라는 우리에게 인간의 능력과 문화의 힘 앞에서는 도시의 입지가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었는지 모른다.

김영훈 대진대 건축공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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