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틈으로 들여다 본 수덕여관은 켜켜이 쌓인 먼지와 아직 정리하지 못한 삶의 도구들이 널브러졌다. 수덕사는 신여성 일엽이 청춘을 불사르다가 영원히 청춘을 얻겠다며 삭발귀의한 곳이다. 또 다른 페미니스트 나혜석이 시대의 모순에 맞서다가 이혼까지하고 극도로 황폐한 몸을 이끌고 찾은 곳. 그러나 절대로 중이 될 수 없는 숙명을 읽었을까? 일엽의 중제에도 만공스님은 그녀를 받아주지 않았다.
3년여를 머물다가 그녀는 또 하나 비운의 주인공 고암을 남겨두고 이곳을 떠난다. 고암은 이 집을 사들였으나 조강지처와 이혼하고 21년 젊은 여자를 데리고 프랑스로 갔다. 그가 훗날 동백림 사건으로 옥고를 치룰 때 본부인은 옥바라지까지 했다. 하지만 그를 받아준 옛 부인을 남겨두고 다시 건너간 파리에서 목숨을 버린다. 수덕여관을 마지막까지 지킨 영원한 주인 박귀희 여사도 떠나고, 빈 집 초가 끝에서 윙윙대는 바람이 섧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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