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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병호 칼럼] 흙
오피니언 임병호 칼럼

[임병호 칼럼] 흙

임병호 논설위원•社史편찬실장 bhlim@ekgib.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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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진 국회의원(민주통합당)이 최근 흙의 중요성을 알리고 건강한 흙에서 안전한 농산물을 생산하기 위해 ‘흙의 날 법제화’를 추진 중이라고 밝혔다.

농림어업 및 국민식생활 발전포럼 상임대표를 맡고 있는 국회의원답다. 환경을 보존하고 식량안보를 달성하는 데도 ‘흙의 날’이 법정기념일로 되면 일 하기 좋다는 김 의원의 말에 동감한다. ‘흙의 날’은 농협이 2000년에 제정했지만 법정기념일은 아니다. 유엔식량농업기구(FAO)도 2012년 12월 이탈리아 로마 FAO본부에서 열린 총회 때 12월5일을 ‘세계 토양의 날’로 제정했다.

우리나라에선 그동안 매년 ‘흙의 날’을 맞아 농협이 주관하는 기념식과 농민신문사ㆍ토양비료학회가 주최하는 ‘흙을 살리자’는 심포지엄을 열고 흙과 농산물 생산의 절대 연관성을 알려왔다. ‘흙의 날’인 11월9일에서 11(十一)은 흙(十+一=土)을 의미하며 9는 작물 생육에 필요한 필수원소 중 다량원소 9가지(산소ㆍ수소ㆍ탄소ㆍ질소ㆍ인ㆍ칼륨ㆍ석회ㆍ고토ㆍ황)를 뜻한다고 한다.

‘흙’을 생각해 본다. 우리 민족은 일찍이 원시적 농경으로 토지와 인연을 맺어왔다. 식물의 생장ㆍ결실이라는 자연의 변화과정을 인간의 힘과 책임에 의해서 재현하는 농경생활은, 식물 그 자체나 식물의 계절적 순환 또는 식물을 만들어내는 대지(흙) 등을 둘러싸고 곡령관(穀靈觀), 죽음과 재생관, 지모신관(地母神觀) 등 여러가지의 주술적ㆍ종교적 관념, 관습 등을 발생하게 하였다. 지모는 모든 사물의 영원한 생명적 근원을 의미한다.

농경민족에게 흙과 땅은 먹을 것을 제공해주는 단순한 농경지로만 인식된 것이 아니다. 태어난 곳이자 되돌아가야 할 숙명적인 근원지였다. 흙을 일구고 그 흙 속에 식물을 키워 양식을 장만하며, 흙을 이겨 지은 집에서 삶을 살아온 인간들에겐 흙과 땅이 가장 큰 유일한 은혜적 존재이고 안식처였다. 설혹 홍수ㆍ혹한ㆍ가뭄 등 자연의 시련을 겪어 때로 헐벗고 굶주리며 살았어도 흙과 땅을 경배하였다.

이러한 생각들이 삶 속에 승화돼 흙과 땅을 수호신적인 존재, 은혜적인 존재, 신앙의 대상으로 섬기는 심성을 낳았다. 우리 민족에게 흙은 농토ㆍ농민생활ㆍ경제ㆍ재산, 그리고 소유를 의미하였다. 경제활동의 중심이자 생활의 터전이며, 생명이 달려 있는 곳이다. 한치의 땅을 더 얻는다는 것은 곧 재물과 복을 얻는 일이며, 한치의 땅을 잃는다는 것은 삶의 한 부분을, 생명의 한쪽을 잃어버리는 것을 뜻하였다. 비옥하며 넓은 땅에 대한 희구는 현세적인 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내세까지도 연장하려는 집착이 강하였다.

인간에게 흙과 땅은 절대적 힘을 가진 생존과 삶의 근간이다. 그래서 인간은 흙을 떠나서 살 수 없을 뿐 아니라 친화력을 깊이 맺었다. 민속에 나타난 여러 놀이ㆍ행사는 이것이 상징적으로 표출ㆍ신앙화돼 인습적으로 전해 내려온 ‘흙의 사상’이다. ‘지신(地神)밟기놀이’는 한해의 풍년ㆍ안택(安宅)ㆍ무병장수ㆍ초복(招福)을 빌며 악귀를 몰아내고 착한 신을 불러들이는 놀이다.

흙에는 또한 정신적인 의미가 깊다. 고향으로서의 흙이다. 그 땅에서 태어났으며 조상의 피와 땀이 섞인 흙에서 자신의 뿌리와 가치관을 찾는 토착적 생각이 흙을 고향으로 연결시킨다. 흙은 물과 더불어 자연의 근간으로, 인생은 흙에서 태어나 흙 속으로 돌아가는 것이 그 행로라 여겼다. 바로 환토관(還土觀)이다.

사람들은 문명의 발달로 도시화ㆍ규격화 등의 현상이 점차 깊어짐에 따라 흙과 함께 하는 생활, 흙과의 친화ㆍ교류, 흙으로의 회귀 등을 추구한다. 그렇다. 흙을 생각해보면 ‘흙의 날’을 법정기념일로 지정하는 일은 지극히 당연하다. 올해 11월9일엔 김춘진 의원이 하시는 일이 이뤄져 법제화된 ‘흙의 날’을 맞이했으면 좋겠다. 바야흐로 춘분 무렵이다. 여럿이서 들녘에 나가 밭두렁 논두렁 그 촉촉한 흙길을 맨발로 걸어야겠다.

임병호 논설위원社史편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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