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출아버지 이야기 ‘소금’ 연재마쳐 청년들, 현실에 안주하면 ‘늙은이’ 가혹한 현실 당당히 맞서길…
변덕이 심한 사람을 가리켜 ‘변덕이 죽 끓듯 하다’고 말한다. 작가 박범신(67)도 해당되는 이야기다. 오죽하면 별명이 ‘좌질투 우변덕’일까. 그는 편안함을 싫어한다.
그래서 환경을 극단적으로 바꿔버리는 나쁜 습관이 있다. 24년 동안 산 서울 평창동 집을 떠나 2011년 고향 논산 외딴집으로 내려올 때도 그랬다.
아내가 해주는 뜨끈뜨끈한 밥을 마다하고 짐을 꾸렸다. 67세의 노(老) 작가는 안주하고 편안해지면 ‘늙는다’고 한다. 그래서 요즘은 5일은 논산에서, 2일은 서울에서 지내는 ‘5촌2도’의 불편한 생활을 하고 있다. 지난 2월 5일 오후 평창동 자택 앞 단골 커피숍에서 ‘영원한 청년작가’ 박범신을 만났다.
전날 마신 술로 푸석푸석한 피부, 덥수룩한 흰머리에 구멍 난 장갑을 끼고 나타난 작가를 본 순간 흔들리고 말았다. 그의 소설 ‘은교’의 노(老) 시인 이적요와 마주한 느낌이랄까. 솔직히 이렇게 사심 가득한 인터뷰는 처음. 담담한 척 ‘은교’이야기부터 꺼냈다.
장편소설 ‘은교’를 통해 욕망을 말하다
“내 작품의 영화화는 여행하는 기분”
2012년 작가는 무척 바쁜 한해를 보냈다. 다 ‘은교’ 때문. 70세 노인 ‘이적요’와 17세 소녀 ‘은교’를 주인공으로 파격적인 내용을 담은 장편소설 ‘은교’(문학동네, 2010)가 영화로 만들어지면서 큰 인기를 끌었다.
2010년 ‘은교’를 탈고한 작가는 “내가 미쳤다. 이 소설을 불과 한 달 반 만에 썼다. 정말이지 폭풍으로서의 질주였다. 내장들이 쑥 빠져나간 듯했다. 나는 쭉정이가 돼 어둔 방구석에 가만히 누웠다”라고 말했다.
평생 원고지를 고집했던 작가가 처음으로 컴퓨터 자판을 사용해 쓴 소설이자, 개인 블로그에 연재하면서 한 달 반 만에 완성한 ‘은교’가 2년 만에 영화 덕에 소설이 다시 베스트셀러가 됐다. 통장도 두둑해졌다.
“제아무리 영화를 잘 만들어도 원작자로서는 100% 만족하기는 쉽지 않다. ‘은교’도 불만을 말하자면 밤을 새도 모자란다. 허나 영화는 감독의 작품이지 내 작품이 아니다.
은교와 노인의 멜로가 원작보다 힘이 좀 빠진 느낌이다. 그래도 한국 영화판에서 그 정도 나왔으면 다행이다. 내 작품이 영화화되는 건 마치 여행을 하는 기분이랄까. 70대 노인이야기라 젊은이들이 외면할 것이라 생각했다. 나의 속단이 틀렸다. 많은 20대 젊은이들이 은교에 홀릭 당했다.”
작가는 원작과 비교해 영화 ‘은교’에 대해 “비교적 만족한다”며 인터뷰 당일 저녁에 영화 ‘은교’의 메가폰을 잡은 정지우 감독을 만난다고 했다.
그의 영화여행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1980년대를 풍미했던 스타작가답게 그 당시 ‘죽음보다 깊은 잠’(1979년 개봉), ‘풀잎처럼 눕다’(1983년 제작), ‘불의 나라’(1989년 개봉) 등 거의 모든 작품이 영화, 드라마로 제작됐다.
그는 스타작가였지만 그 시절을 “고통스러웠다”고 기억한다. 작가의 고통은 고향 논산에 내려가서 발표한 그의 산문집 ‘나의 사랑은 끝나지 않았다’(은행나무, 2012)에도 고스란히 기록돼 있다.
‘밖으로는 정치적인 억압이 목을 조르는 시대와 불화를 겪어야 했고 안으로는 ‘동지’라고 부르고 싶었던 문단 내부와 불화를 겪어야 했던 것입니다.
자학이 깊어 안양을 도망치듯 이사를 했고, 그것도 모자라 동맥을 자르고 더러운 안양천변에 누워 있었던 끔찍한 사건을 저지른 것도 이 무렵의 일이었습니다. 세 아이의 엄마였던 아내가 아파트 경비원을 총동원해 실신한 나를 찾아 병원으로 옮기던 날 저녁 풍경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나의 사랑은 끝나지 않았다’ 304p)
그는 지난해 방송된 SBS ‘힐링캠프, 기쁘지 아니한가’에 출연해 10대 시절 2번, 대학시절 1번, 결혼 후 1번 등 4번의 자살미수 경험을 털어놨다. 그는 1979년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안양으로 이사 왔다. 그리고 안양천변에서 네 번째 자살시도를 했다.
민주화와 이념에 얽혀있는 격동의 시대에 인기작가 반열에 있어야 하는 것 자체가 그에겐 가시방석이었다. 그래서 위험한 시도까지 하게 된 것.
박범신은 2012년 영화 ‘은교’로 다시 한번 세상의 중심에 섰다. 1980년대 인기에 비하면 ‘세발의 피’란다.
“80년대는 문학이 큰 힘을 가지고 있던 시절이다. 작가나 문학하는 사람들이 전 장르에서 중심에 있을 때다. 그 시절엔 광고를 안 해도 몇 십 만권씩 책이 팔렸던 그야말로 문자문화가 꽃피웠던 시대였다.
90년대 넘어가면서 문화의 권력이 영상으로 넘어가면서 소설이 영화화되면 베스트셀러가 되는 시대가 됐다.”
작가는 은교를 통해 두 남자와 한 여자의 얽혀 있는 사랑을 그리고 있지만, 작가는 그들의 모습을 통해 ‘갈망’을 이야기했다. 남자와 여자, 젊음과 늙음, 시와 소설, 욕망, 죽음 등에 대한 존재론적인 질문을 던졌다.
박범신은 고백했다. “이 소설로 나는 내 안의 욕망이라는 게 여전히 눈물겹게 불타고 있음을 알았다”라고 말이다.
가출한 아버지 이야기 ‘소금’ 연재 마쳐
“아프니깐 청춘이 아니고 이겨내니깐 청춘”
2013년 얼마 지나지 않아 작가는 가출한 아버지 이야기를 다룬 ‘소금’ 연재를 마쳤다. 그가 그린 아버지는 어떤 상일까.
그의 소설에는 사우디에 가서 돈 버는 아버지, 월남전에 파병 가서 다리가 잘린 아버지, 부정부패한 아버지 등 다양한 우리의 아버지들이 등장한다. 작가는 시대를 닮은 아버지상을 그리면서 치열했던 지난 50년의 역사를 이야기하고 있다.
“아버지들은 절대 가부장적인 시대의 권력자였다. 50대 이상의 아버지들은 지난 반세기 동안 야수처럼 일하면서 5천년 가난의 사슬을 끊은 세대다. 그런 아버지들이 90년대 지나면서 권력은 해체되고 세상의 중심에서 밀려나 매우 쓸쓸하게 늙어가고 있다.
솔직히 ‘소금’은 20~30대 젊은이들이 읽기를 바라고 작정하고 쓴 소설이다. 늙어가는 아버지를 우리 마음의 중심으로 모셔 와야 우리 사회가 건강하지 않겠느냐.”
그러면서 작가는 요즘 아프다고 엄살 피는 청춘들에게 따끔하게 충고했다. ‘아프니깐 청춘이 아니고 이겨내야 청춘이다’라는 것.
“우리 아버지들은 절대빈곤의 시대에 굶주린 청춘을 보냈다. 청춘의 특권은 아프기 때문이 아니다. 아픔을 이겨낼 수 있는 에너지가 있기 때문에 청춘이다. 가혹하게 이겨내는 것이 청춘인데 요즘 청춘들은 너무 빨리 안주하려 하고 편안한 것을 찾는다. 스무 살이라도 현실이 주는 안락함에 기대 산다면 그는 이미 늙은인데 말이다.”
작가는 최근 연재를 마친 ‘소금’을 통해 권력은 해체되고 권리와 의무만 남은 늙은 아버지를 원망하지 말고 우리 사회가 압축성장하는 과정에서 생긴 그늘을 젊은이들이 같이 짊어지고 가자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삼남매의 아버지이기도 한 박범신은 아직도 ‘청춘’이라고 자부한다.
“변혁에 대한 욕망을 놓치지 않으면 일흔이 넘어도 그는 청춘이다. 나는 나이를 안 먹는 것 같다.(하하) 글 쓰는 나는 예민한 짐승이다. 그 짐승이 하는 말을 받아쓰는 느낌이다.
내 육체는 늙었지만 내 가슴 속 짐승은 안 늙었다. 일종의 감수성, 창조적 자아는 나이가 없다. 그러니 사람들은 나더러 ‘청년작가’라 부른다. 나의 꿈과 부합하기 때문에 청년작가라는 타이틀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죽을 때까지 강력한 현역성을 갖고 싶다.”
변혁에 대한 욕망이 큰 작가는 말년에 편한 집을 떠나 2011년 논산으로 내려갔다. 고향에서 안빈낙도하겠다는 뜻은 아니었다고 한다. 오로지 불편한 환경에 가야지만 자신을 더 혁명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선택한 고향길이다.
더불어 히말라야를 15번 정도 등반한 것도, 해마다 오지 여행을 하는 것도 결국 심심한 것을 고통스럽게 여기고 변화에 대한 욕망이 큰 성격 탓 아닐까.
새 소설이 그를 부르고 있다
봄 연애소설·가을 역사소설 계획 중
작가는 글을 안 쓰고 있을 때는 굉장히 우울해지고 자학증도 심해진다. 요즘도 7~9시간은 앉아서 글을 쓴다. 그래서 다작(多作) 작가라고들 한다. 하지만 그는 강하게 부정한다.
“1년에 한 권 쓰는 게 무슨 다작입니까. 절대 다작 아니다. 나는 너무 적게 썼다. 아직 도스토예프스키만큼도 못썼다. 내 가슴은 자기 이야기를 써달라는 인물들로 꽉 차 있다. 그러니 마음이 바쁘다. 마음속에 찾아온 인물들이 너무 아프게 요구하고 있다. 그들이 안타까워 더 쓰고 싶다. 나는 문학순종주의, 문학제일주의자라 소설 쓰는 일이 제일 재미있다. 글 쓸 때 내 영혼이 최고조로 충만돼 있다. 연애하는 기분이지.”
박범신은 글이 자신의 연인이라고 소개한다. 천상 작가다. 그래서 토끼 같은 손자손녀도 그에겐 2등.
“손녀딸이 예쁘긴 하지만 죽을 정도로 예쁘진 않다. 나에게 글이 있으니. 참 못된 할아버지다.(하하)”
어렸을 때 잠시 목수가 되고 싶었던 박범신은 고등학교 때부터 ‘문학환자’가 됐다. 올해로 등단 40년차, 그는 여전히 지독한 ‘글 상사병’에 걸려 신음 중이다.
쉼 없이 올 봄, 작가는 연애소설을 계획 중이라 했다.
“아직 자세한 이야기는 못하지만 아름답고 눈물겨운 클래식한 연애소설 한번 짧게 워밍업으로 쓰려고 한다. 올 가을쯤엔 역사소설을 생각 중이다. 내 정신, 내 감수성은 안 늙었으니.”
2013년 작가 박범신은 여전히 쓰고 있다. 그럼으로 그는 존재한다. 새 소설이 그를 부르고 있다.
글 _ 강현숙 기자 mom1209@kyeonggi.com 사진 _ 추상철 기자 scchoo@kyeong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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