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역사 애환 간직한 달동네
인천 앞바다 만석 부두를 코앞에 둔 인천 만석동 9번지. 이곳 인근에는 ㈜동일방직, ㈜두산인프라코어 등 대형 공장과 20층 가까이 되는 초고층의 인천만석비치타운 아파트가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바로 길 하나만 건너면 인천의 마지막 쪽방촌 괭이부리말(아카사키촌)이 펼쳐진다.
김중미 작가의 소설 ‘괭이부리말 아이들’(2000)의 주요 소재로 쓰인 이곳은, 얼기설기 얹어진 슬레이트 지붕 아래 저소득층 서민들이 사는 전국에서도 대표적인 달동네다.
만석부두 앞 묘도(고양이섬)의 이름에서 유래했는지, 만석부두를 나는 괭이부리말 갈매기의 이름에서 유래했는지, 아니면 일본식 적산 가옥이 즐비하다 해서 부르기 시작했는지 다양한 이야기 만큼 괭이부리말의 역사는 100여 년을 이어오고 있다.
1900년 초 괭이부리말은 조선인 20~30가구가 사는 그저 한적한 마을이었지만, 1930년대 ‘동일방적’(현 동일방직)과 ’조선기계제작소’(현 두산인프라코어)가 들어선 후 다른 지역에서 온 노동자의 판자촌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1950년 한국전쟁이 터진 뒤로는 황해도민의 피난처였고, 산업화 과정에선 농촌에서 올라온 노동자들의 거주지였다.
괭이부리말의 이야기는 그대로 20세기 근대 인천사의 축소판이다.
“이렇게 굴이라도 까야 할망구랑 둘이 밥 먹을 돈 만원이라도 손에 쥐죠. 하루 이틀 까는 것도 아니고 여기 사람들 많이들 그럽니다.”
황모씨(79)는 쪽방촌 끄트머리에 자리 잡은 움막 옆에서 할머니와 함께 굴까는 작업을 하고 있다.
집이라 해봐야 5평도 안 되는 방 한 칸, 골목이래 봐야 사람 둘이 다니면 어깨가 부딪히는 동네라 부둣가나 이곳 움막까지 나와야 굴 자루라도 펼쳐놓고 작업을 할 수 있다.
이곳 사람들은 굴을 까거나 폐지를 주워 판 돈으로 겨우 밥을 먹고 산다.
그나마 요즘은 복지단체가 운영하는 공동작업장에서 일하면 월 10만원을 벌 수 있지만, 일을 할 수 있는 주민은 20여 명에 불과하다.
이미 주민 절반가량은 기초생활보장 수급자로 국가 지원 없이는 생활이 어려울 정도로 막막한 상황이다.
움막을 지나 본격적인 골목길로 오르니 집 앞마다 연탄과 LPG 가스통이 널려 있다.
벽돌과 판자들이 뒤엉켜 재료조차 분간하기 어려운 집들은 옆으로 위로 사방팔방 겹쳐 지어져 한 채 두 채 세기도 쉽지 않다. 이렇게 지어진 집들이 모두 338동, 이 중 무허가 가옥만 해도 229동이다.
골목길을 따라 들어가면 어디로 들어가 어디로 나오는지 알기 어려울 정도로 길이 끝없이 이어지는 판자촌은 집이 너무 좁아 어떤 집들은 입구가 사람 어깨 너비만 할 정도다. 화장실이 따로 없는 집이 대부분으로 목욕도 제때 하지 못하는 마을 사람들은 공동화장실에서 용무를 해결하곤 한다.
대부분 집이 지어진 지 30~40년을 넘으면서 집중 호우가 왔다가면 집 한쪽이 허물어지는 일은 이제 예삿일이다.
결국, 나이 든 노인들이 저세상으로 가거나 일거리와 머물 곳이 없어진 사람들이 하나 둘 떠나면서 한 때 1천여 명에 육박하던 주민 수도 이제는 767명에 불과할 정도로 빈집이 눈에 띄게 늘고 있다.
김모씨(83·여)는 “얼마 전 비가 많이 왔을 때 집 근처가 무너졌다”며 “이전에 서로 밥도 나눠 먹던 사람들이 하나 둘 이사 가고 죽고 하면서 이제는 나 혼자 여기서 살면 무섭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한 세기 만에 괭이부리말이 새롭게 탈바꿈한다.
삶의 터전을 통째로 밀어버리고 원주민은 밀려난 채 새 아파트를 찾아온 다른 지역 사람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여느 재개발과는 다르다.
원주민 재정착률 100%를 목표로 골목골목 100년 역사의 흔적을 살리는 ‘현지보존형’ 개발 방식이다.
전체 부지(2만246㎡)의 15% 정도를 차지하는 부지에만 임대 아파트를 짓고, 나머지 85%엔 기존 주택개량사업이 추진된다.
임대 아파트는 현재 집이 너무 낡아 개량이 어려운 가구를 위해 전용면적 18~38㎡짜리 보금자리주택 98가구를 짓는다.
38㎡ 이상이 대부분인 보금자리주택과 달리 소형 규모의 가구를 배치, 1인 가구가 많은 주민의 거주상황과 경제규모를 고려했다.
이미 국토해양부로부터 65억6천만원을 지원받아 총 사업비 110억9천만원 중 상당한 부담을 덜었다.
수차례 주민설명회를 거쳐 2개월 만에 보상 및 이주를 완료했으며, 지난해 9월 착공, 오는 9월께 완공할 예정이다.
주택 개량사업이 진행되는 나머지 지역은 슬레이트 지붕을 전부 걷어내고 낡은 집과 골목을 말끔하게 정비할 계획이다.
수년간 괭이부리말의 인구가 감소하고 빈집이 늘어나자 시와 동구청은 지난 2011년 정부로부터 27억원을 지원받아 희망마을 만들기 사업, 도시 활력 증진사업 등을 추진하고 있다. 부족한 기반시설인 노외주차장 2곳과 텃밭 형식의 공원 2곳이 들어서며 공동화장실도 개선하게 됐다.
마을 주민의 일거리를 위한 공동작업장 4곳이 조성될 예정이다. 이미 지난해 12월 20일 두산인프라코어와 시가 주민들이 직접 운영할 김치생산공장 사회적 기업 설립 관련 협약을 마쳤다.
지자체가 나서 석면 슬레이트 지붕 철거, 국민주택기금 저리융자, 봉사단체 및 직능단체 재능기부 등을 통해 기존 주민들의 쉼터를 보전할 수 있도록 도울 예정이다.
단, 지자체는 큰 틀을 정해 행·재정적 지원에만 나서고 실질적인 개발 방향과 운영은 주민과 시민단체 및 전문가에 맡길 예정이다. 주민대표회의를 구성하고 전문가, 시민단체, 지자체 등이 거버넌스를 통해 함께 논의해 구체적인 현지 개량 방향은 정하기로 했다.
전체적인 사업 완료시기는 오는 2018년 예정이며, 주거 문화와 주민 공동체 보존을 최우선 과제로 진행하면서 주민 의견을 우선 반영할 방침이다. 이는 자칫 현지 개량방식이 주민의 개발 기대심리에 부응하지 못한 채 주민의 의사반영도 못 하고 관 주도로만 이어져 ‘껍데기만 남는 개발방식’으로 이어지는 것을 막으려는 조치다.
하명국 시 주거환경정책관은 “현지보존형 개발은 전국에서 처음 채택된 방식으로 현재 한계에 부딪힌 재개발 사업의 ‘출구전략’이 될 것”이라며 “관이 앞에 나서고 주민을 이끄는 방식이 아니라 주민 참여를 최우선으로 진행해 역사·문화적 가치를 훼손하지 않으면서 생활환경을 개선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글 _ 박용준 기자 yjunsay@kyeonggi.com 사진 _ 장용준 기자 jyjun@kyeong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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