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 ‘단 한 번의 연애’ 발표 작디작고 비릿한 사랑노래 작디작고 비릿한 사랑노래
똑똑하고 영민한데다 예쁘기까지 한 여성과 마주하는 일은 곤혹스럽다. 남자들이 그녀를 놓고 목숨걸고 싸우는 장면을 대할 땐 ‘화’가 난다.
흠잡을 데 없이 깔끔한 복색과 생김새, 그러면서도 영원히 그 모습 그대로일 것 같은 ‘인형’의 자태는 같은 여자로서 질투심을 유발한다. 고래잡이의 딸 박민현은 그런 여자다. 민현은 ‘우리 시대의 이야기꾼’으로 불리는 성석제(52) 작가가 처음으로 쓴 연애소설인 ‘단 한 번의 연애’(휴먼앤북스刊)의 여자 주인공이다. 등단 27년차 중견작가 성석제가 새삼스레 연애소설이라니.
그에게 전화를 걸어 만나자고 했다. 1월 17일 오후 서울 홍대에서 만난 그는 경상도 사나이였다. 무뚝뚝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에게 사진촬영을 요청하자 “작가 학대”라고 항변했다. 연출 사진을 못마땅하다는 그의 투정에 대꾸하지 않고 여세를 몰아 민현이 이야기부터 꺼냈다.
그 아름답고도 간절한 구원의 서사!
동해안 어촌마을 구룡포에서 태어난 남자 이세길은 초등학교 입학식에서 고래잡이의 딸 박민현을 만나 그녀의 매력에 사로잡힌다.
‘처음에 나는 그게 인형인 줄 알았다. 직접 본 것 같지는 않은데 어쩐지 본 듯한 느낌을 주는 일본 인형, 이국적이면서도 내가 아는 여자들과 어딘지 닮았고 품위 있으며 세련된 인형….’(p17)
세길은 민현의 첫인상을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
그 시점부터 남자는 유년 시절, 중고등학교 학창 시절, 데모와 미팅으로 대변되는 대학 시절, 그리고 군대(전경) 시절을 거쳐 사회인으로까지 이어지는 한 여자만을 향한 아름답고도 운명적인 연애가 펼쳐진다.
민현과 세길의 사랑은 달달하지 않다. 사랑해서 결혼하고 행복하게 사는 해피엔딩 구조로 전개되지 않는다. 민현은 어렸을 때부터 세길을 ‘이용하고’ ‘버리고’ ‘떠나고’를 반복한다. 둘은 쫓고 쫓기는 추격전을 펼친다.
작가는 여자주인공 민현에 대해 “100% 허구다. 초등학교 친구 중에 민현이라는 이름을 가진 아이가 있었는데 남자 녀석이었다.(하하)”고 설명했다.
허구의 인물치곤 민현의 미(美)는 굉장히 구체적이고 미(美)의 활용범위가 넓다.
“미(美)가 의미를 가지려면 쟁탈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미는 권력의 표상이기도 하다. 그런 측면에서 민현은 단순한 여성적인 아름다움을 소유한 것이 아니다. 피부색깔, 눈빛, 하얀 치아, 붉은 입술 게다가 민현에게는 강력한 페로몬이 있다. 그리고 그걸 그녀는 자신에게 유리하게 사용할 줄 아는 여자다. 수많은 추문의 주인공이지만 도덕적으로 민현은 문제가 없는 인물이다. 세길이에게 모든 첫 경험을 주는 여자다.”
“나의 신은 민현이었다”라고 고백하는 세길이처럼 성석제도 그녀에게 푹 빠져 있어 보였다.
고래잡이배의 포수인 아버지와 ‘나나’라고 불리는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인 집의 심부름꾼 출신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의 가정폭력에 노출되어 있던 민현을 알고 난 후 지속된 세길의 연애 여정에는 삶이 지닌 본연의 폭력성과 한국 현대사 50여 년의 격렬한 물결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 험난한 질곡의 순간순간마다 평범하기 짝이 없는 세길의 한결같은 맹목적 사랑은, 비범하지만 위안의 장소가 없는 그녀에게 구원의 도피처가 되어 준다.
성석제 특유의 유머와 통찰, 그리고 동세대의 경험담을 풍부하게 녹여내며 첫 연애소설에서 사랑과 구원이라는 인간 본연의 보편적 테마를 세밀하게 그려냈다. 때론 유쾌하게, 때론 유머러스하게, 한편으로는 가슴 아리게 말이다.
“책을 통한 정신적 확장 문제 없다”
작가의 개인 연애사를 묻지 않을 수 없었다. 허나 성석제는 단호하게 정리했다.
“개인적인 이야기는 작품과 관련이 없으니 노코멘트다. 나의 이야기를 쓰게 될 경우 자기 과장이나 주장이 되기 쉽다. 개인사는 작품에 투영하지 않는다.”
대신, 몇 개월 동안 동거동락한 민현의 이야기를 이어갔다.
“고래잡이의 딸은 커서 사회적 약자를 위해 경제계 거물의 뒷거래를 캐는 컨설턴트로 세계를 누비며 ‘나쁜 고래를 잡는’ 고래잡이가 된다. 민현의 아버지는 생계를 위해 고래를 잡았지만 민현은 세상의 악을 막기 위해 적극적인 모성을 발휘해 사악한 자본, 거대 자본가, 국가권력 등 나쁜고래에 맞선다.”
그러면서 자신의 어린시절을 회상했다.
“어렸을 때 누나 2명, 고모, 어머니, 할머니와 같이 살면서 누나들한테 구박당한 기억도 있다.(하하) 평소 여자들에 대해선 두려움과 숭배감, 신비감을 느끼고 있다. 최근에는 여성들이 정의감이 가지고 생명, 자본, 독과점 등에 대해 분노하고 대항하고 몸으로 행동한다. 그러는 사이 남자들은 찌질하게 안분자족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작가는 고래잡이 딸 이야기를 쓰기 위해 구룡포로 달려갔다. 신들린 듯 여관방, 민박집, 카페와 찻집, 음식점, 바닷가, 해수욕장, 나무 그늘, 구멍가게 등 어디든 가리지 않고 앉아서 키보드를 두들겼다. 초고 쓰는데 두달, 원고가 완성하기까지 총 다섯 달을 공들여 연애소설을 썼다.
작가는 “집에선 작업이 안된다. 뭔가 좀 쓸려면 어딜 가야 한다. 계속 옮겨다니며 화전민처럼 작업하고 있다”고 했다.
실제로 그는 화전민이 아니다. 1960년 경북 상주에서 태어났으며 지금은 20여 년째 군포에 살면서 작품활동을 하고 있다. 군포시가 핵심 사업으로 추진하고 있는 ‘책 읽는 군포’의 추진위원으로 참여해 힘을 보태고 있기도 하다.
“군포는 전국에서 세 번째로 작은 도시로, 서울의 자그마한 위성도시지만 5개의 공공도서관, 30여 개의 작은 도서관이 운영되고 있다. 군포는 지리적 확장은 한계가 있지만 정신적 확장은 문제없다.
책을 선택한 것은 잘한 선택이다. 2011년에는 가난하고 어리석은 농부 황만근의 일대기를 다룬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2002)가 군포의 책으로 선정돼 시민들과 읽기도 했다. 특히 군포시중앙도서관 열람실에는 지역 출신 향토작가들을 위한 창작센터도 마련돼 있다.”
자전거 마니아의 올해 계획중인 연재는?
그는 원래 1986년 시인으로 등단했다. 그러나 지금은 시를 쓰지 않는다.
“친구들이 시를 썼다. 덩달아 쓰면서 시집도 냈다. 시에 대한 미련은 없다. 시를 다 써 버렸기 때문에 못 쓰는 것이다. 시는 언어의 보석 같은 거고 광석을 다듬는 작업이다. 지금은 시를 어떻게 써야 하는지 모르겠다.”
평론가 우찬제는 그를 거짓과 참, 상상과 실제, 농담과 진담, 과거와 현재 사이의 경계선을 미묘하게 넘나드는 개성적인 이야기꾼이라 평했다. 또한 평론가 문혜원은 “성석제는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허구이고 농담인지 구별하기 어려운 이야기를 막힘없이 풀어놓으며 마치 무협지의 고수들처럼 과거와 현재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입담을 펼친다”라고 말했다.
시인에서 소설가로 변신한 그는 평론가들의 말처럼 미묘한 경계선을 거닐면서 재미난 입담으로 이야기를 펼치는 작가로 사랑받고 있다.
작가는 지극히 개인적인 질문하는 것을 싫어한다. 그나마 자전거 이야기는 달가워한다.
“고향인 상주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자전거 도시다. 중학교 1학년 때 딱 1년인가 타 본 게 다다. 그러나 한 10년 전부터 다시 자전거를 타기 시작했다. 자전거는 인간이 만든 도구 중에 가장 친환경적이고 실용적이며 아름다운 도구인 것 같다. MTB 타다가 지금은 미니벨로를 탄다.”
그는 자동차에 자전거를 싣고 다닌다 했다. 아마도 뭔가 쓰고 싶을 때, 써야 할 때 편하게 떠나기 위해서 일 수도 있다. 화전민처럼 말이다. 작가는 올해 연재를 계획하고 있다. 주요 스토리는 비밀이라 했다. 다음 작품이 벌써 기다려지는 건, 그가 펼쳐놓은 재담의 맛에, 필력의 맛에 중독된 게 분명하다.
글 _ 강현숙 기자 mom1209@kyeonggi.com 사진 _ 추상철 기자 scchoo@kyeong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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