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원에서 놀자]<24>김포문화원 ‘중봉문화제’

도학과 절의 겸비한 '겨레의 사표' 조헌선생 뜻 기려

한국의 역사문화에 중대한 변화를 초래한 국제전쟁이었던 ‘임진왜란(壬辰倭亂)’이 2012년 일어난 지 420년을 맞았다.

많은 이들이 임진왜란하면 이순신 장군을 기억한다. 그도 그럴 것이 이순신 장군은 임진왜란 중 투철한 조국애와 뛰어난 전략으로, 나라와 민족을 왜적으로부터 방어하고 격퇴함으로써 한국 역사상 가장 추앙받는 인물의 한사람으로 역사에 남겨졌다.

이에 반해 중봉 조헌(趙憲, 1544 ~1592년) 선생을 기억하는 이는 드물다. 그는 임진왜란시 최초로 의병을 일으켜 왜군을 격퇴하는 등 나라사랑의 모범이 되고 겨레의 사표가 된 인물이다.

중봉은 사생취의의 정신으로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투쟁하다 8월18일 금산전투에서 700명의 의사와 함께 순절한 인물이다.

중봉 조헌 선생이 태어난 경기도 김포에선 그의 애국애족 정신과 용감한 살신성인 정신을 기리기 위해 중봉문화제를 개최해오고 있다. 김포시민들이 지역의 사표(師表)로 중봉 선생의 삶과 사상을 고구(考究)하는 이야기를 들어봤다.

■조선왕조 최대 사건 ‘임진왜란’을 예언한 조선 중기 문신 ‘중봉’

조선 왕조 최대의 사건으로 통하는 임진왜란은 누구나 알다시피 1592년(선조 25년)부터 1598년까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에 따라 왜군들이 조선 땅을 짓밟은 사건이다. 7년간 지속한 전쟁은 조선, 일본, 명나라 3국의 군사 100만 명이 동원됐다.

이처럼 임진왜란은 한반도 전쟁사에서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국제적 사건이자 일본세력이 성장하는 계기가 된 첫 사례로서 중국 중심의 전통적 체제를 뒤흔들어 놓은 사건이었다.

조선 16세기 후반 정치사회적 혼란이 가속화되고 일본의 조선침략이 가시화되는 시기였다. 그러나 국제정세에 어두워 일본의 동향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중봉은 일본의 침략을 예언하고 있었다. 중봉은 46세(1589년) 4월에 올린「논시폐소(論時弊疏)」에서 과도한 세금과 부역과 그리고 지나친 형옥(刑獄)으로 인해 당시 민생의 곤궁함과 국가 운명이 기울어지는 위급한 상황에 대해 ‘수많은 백성들을 밑이 뚫린 배에 태워 출항하였다가 바다 한 가운데 풍파를 만나 행방을 잃은 것과 같다’고 비유했다. 만약 특단의 조치를 마련하지 못하면 내란과 외침을 막지 못할 것이라고 예언하고 나라와 백성을 위한 단기ㆍ장기 대책을 제시했다.

임진왜란이라는 대 참변을 겪은 후에야 사람들은 중봉 선생의 선견지명과 예지를 뒤늦게 깨달았다고 한다.

■ 남다른 ‘혜안’과 굳건한 ‘의기’로 겨레의 사표가 된 인물

중봉은 고려말 홍건적을 격파하고 전사한 천주의 후손으로 1544년 김포 감정리에서 태어났다. 김황에게 수학하고 성균관에 유학했으며 24세 때 과거에 급제한 이래 정주, 파주, 홍주목의 교수와 교서관의 저작, 박사를 거쳐 예조좌랑, 통진현감, 공조좌랑, 전라도사, 종묘서령, 보은 현감 등을 역임했다.

토정 이지함, 우계 성혼, 율곡 이이에게 수학했으며 특히 율곡의 학덕을 배우고 기린다는 뜻으로 ‘후율(後栗)’이라 자호했다.

16세기 조선사회에 대한 현실 인식과 실천적 학문관을 토대로 정치ㆍ교육ㆍ경제ㆍ군사에 관한 근본적인 개혁론을 제시했으며 철저한 민생 안정을 주장했다.

왜적의 침입을 예견하고 대비할 방책을 거듭 상소했으며 그의 예측대로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충청도에서 최초로 의병을 일으켰다. 충청도 공략 본거지를 탈환하는 전과를 거뒀으나 의주로 북상하기 전 왜군에게 함락당한 금산 공격을 강행하다 순국했다. 700여명의 의병과 함께 말이다.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키다 순절한 의병장은 많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중봉을 높이 평가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중봉 선생의 의병활동은 그의 사상이 학문적 체계에만 머문 것이 아니라 현실 참여를 통한 실천성의 발휘였다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중봉은 정암 조광조로부터 내려오는 조선의 도학정신이 퇴계 이황을 거쳐 율곡 이이에게 계승되었음을 강조하고 이 도학정신의 계승을 자신의 임무로 삼았다. 도학과 절의를 겸비한 중봉의 학문 정신은 대대로 민족을 수호하는 원동력으로서 크게 구실해 왔다.

그러나 한국사상사에서 조헌이 차지하는 위상에 비해 그에 대한 연구는 그다지 활발하게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중봉 선생의 태가 묻힌 김포에서 아직까지 중봉 선생이 갖는 역사적 의미를 제대로 구현하고 있는 못한 것이 사실이다. 그래도 김포에는 조헌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고 지방의 유학교육을 담당하기 위해 지은 교육기관으로 우저서원(牛渚書院)이 소재하고 있다. 해마다 봄 2월 중정일(中丁日)과 조헌의 기일인 음력 8월 18일에 향사(享祀)를 지낸다.

■ ‘중봉의 숨결, 우리 곁으로’…2012 중봉문화제 성료

중봉 조헌의 위업을 기리기 위한 ‘2012 중봉문화제’가 지난 5월 30일부터 31일까지 양일간 김포 사우문화체육광장에서 열렸다.

기존 중봉문화예술제가 인물 소재의 축제와 예술제가 혼재돼 축제의 정체성 구현이 어렵다는 의견에 따라 2012년부터는 상반기는 중봉문화제, 하반기 김포예술제로 분리돼 개최했다.

‘중봉의 숨결 우리 곁으로’라는 주제로 중봉 선생의 숭고한 업적을 이어받아 희망을 가슴에 안고, 전통과 현재, 미래의 소통을 통해 김포의 얼을 재형상하기 위해 김포문화원 주관으로 내실 있게 진행됐다.

축제 첫날인 2012년 5월 30일 오전 우저서원의 고유제를 시작으로 오후 3시 사우문화체육광장에서 개막식, 임진왜란 420년 역사 속에 조헌선생을 재조명하는 학술대회, 중봉의 얼에 주안점을 둔 경연 형식의 5월 문화행사(사생, 백일장, 사진, 휘호)가 청소년들의 참여 속에 진행됐다.

이어 31일에는 풍물공연, 오카리나 연주, 품바공연, 한국무용 ‘회상’ 등이 열렸고 오후 4시 폐막식으로 마무리됐다.

강보희 김포문화원장은 “2012년 중봉문화제는 축제의 정체성을 살리기 위해 중봉문화예술제에서 분리된 중봉 선생의 선양과 문화향유의 장”이라며 “비록 화려하지는 않지만 민간주도형으로 실시된 새로운 시도인 만큼, 지속 성장할 중봉문화제의 발전 가능성을 찾을 수 있었다”고 축제의 의미를 부여했다.

글_강현숙기자 mom1209@kyeonggi.com

© 경기일보(www.kyeonggi.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댓글 댓글 운영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