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균의 스케치여행] 덕수궁 돌담길

청춘을 반납하고 아파할 가슴 저림도 없는 홀가분함으로 이 길을 걷는다. 비운의 덕수궁은 왕을 잃고, 왕비를 잃고, 주인을 잃어 비워진 채, 쓸쓸함에 떨고 있었다. 덕수궁 돌담길이 아름다운 건 기구한 역사에도 고궁의 향기가 함께하기 때문일 것이다. 왕은, 작지만 크고 팠던 대한제국의 그리운 임이기도 했던, 이 땅에 풀뿌리처럼 살아온 지난한 백성들의 끄나풀이었던 것이다. 돌담아래서 달고나를 파는 노부부도, 하숙생이란 옛 영화 포스터를 내걸고 호박엿을 파는 아저씨도 이곳에선 외롭지 않다, 조그만 정동교회의 오래된 향기는 은행잎처럼 따뜻하고, 파란 하늘이 파도처럼 걸려있는 언덕 위 러시아공사관도 하얀 눈부심이다. 나는 단풍잎 나부끼는 정동길을 혼자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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