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명 가학광산동굴 100년 스토리’ 출간 성영수 옹

"70년전 근무 실상 생생한 기록… 광산개발 잘 이뤄지길"

“가학광산은 많게는 5~6백명이 근무할 정도로 규모가 큰 광산이었습니다. 광산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외지에서 돈벌이를 목적으로 일하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지역 주민에게 광산은 자식 뒷바라지하고 생계를 책임지는 생활 터전이었습니다.”

광명시가 가학광산동굴 개발을 본격화하고 있는 가운데 70년 전 13세의 어린 나이로 광산 분석소에서 근무한 성영수(82) 옹.

현재 국내에 가학광산에서 일했던 생존자는 성 옹을 비롯해 5명에 불과하다. 광명시는 성 옹을 비롯한 생존자들의 육성 증언을 정리해 최근 ‘광명 가학광산동굴 100년 스토리’를 출간하고 광산의 실상을 세상에 알렸다.

성 옹은 당시 광산에서 일하고 받은 월급으로 공부할 수 있었다. 그 결과 서울대학교 농과대학을 졸업, 40년 동안 중·고교에서 후학 지도에 평생을 바쳤다.

성 옹은 “경제적인 이유로 중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동네 어른의 소개로 일하게 된 광산 일이 평생의 직업이 됐다”며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이 광산동굴에서 채굴된 구리와 아연을 전쟁무기로 조달하려고 일본인이 저지른 만행을 생생히 기억한다”며 70년 전 일을 회고했다.

그는 나이가 어려 광부가 아닌 심부름을 하는 사환으로 일을 시작해 아연, 구리, 철 등 광물질을 광산 내 분석소에서 실험용 소형 용광로에 넣고 녹인 후 각 금속에 해당하는 시약으로 함량을 분석하는 일을 맡기까지 숱한 시행착오를 겪으며 점점 광물질 전문가로 거듭났다.

성 옹이 일하던 때 광산의 관리자들은 모두 일본인이었다. 태평양전쟁이 패색이 짙어진 지난 1944년부터 일본인들의 수탈은 극에 달해 강제 징용과 일본군 강제위안부에 끌려가는 것을 피하고자 멀리서도 광산에 일하려 각지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성 옹은 지금도 광산을 생각하면 부모님 생각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 그는 “광산에 일하러 다닐 때 퇴근하면 길목에 어머니가 나와 계셨어요. ‘내가 어린애냐’며 말려도 어머니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나와 계셨다”며 추억에 잠겼다.

또 “광산이 폐허로 방치됐으나 지금에야 주인을 잘 만나 세상에 알려지는 것을 봐 감회가 새롭다”며 “광산은 지질학 연구 등 학술적 가치는 물론 국가의 보물로서 손상이 없어 개발이 잘 이뤄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광명=김병화기자 bhkim@kyeong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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