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균의 스케치여행] 명성산 아래 산정호수

가을비 머금은 바람이 상처 난 세월처럼 시리게 지나간다. 숲속에서 가랑잎 발효되는 냄새가 눅눅히 풍겨왔다. 억새위로 눕는 갈바람. 1년 후에 배달된다는 빨간 우체통이 있는 언덕에 올라서자, 푸르게 갠 하늘위로 고추잠자리가 고공비행을 한다. 나는 궁예의 떠도는 울음처럼 걸어 신선봉을 지나 삼각봉까지 갔다. 시나브로 울어대는 풀벌레소리를 경계선으로 상처 받은 민둥산 승진 훈련장을 비껴 나왔다. 명성산 아래 산정호수는 사방의 산들을 물구나무 시켜놓고도 모자라 구름까지 엎어놓은 채 하늘과의 오랜 눈싸움을 멈추지 않고 있다. 바람결에 머리빗은 각시 풀이 산자락으로 흘러내리는 오솔 길, 나는 매끈한 솔바람과 물 향기와 짧은 가을데이트를 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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