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나 신문을 보면 연일 정치권에서는 타인을 비방하기에 여념이 없다. 특히나 인터넷과 페이스북 등 순식간에 많은 사람이 열람할 수 있는 아주 좋은 기능이 타인을 비방하는데 쓰이고 있어 안타깝기도 하다. 과연 이 기능을 최초로 만든 사람은 현재 이렇게 사용될 줄 짐작이나 했겠는가. 이는 노벨이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한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광산에서 굴을 팔 때 사람의 힘으로 팔 수 없는 것을 해결하기 위한 것이 전쟁의 무기로 사용된 것이다.
현대사회는 창조와 다양성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창조와 다양성은 하늘아래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랜시간 참고 견딘 결과인 것이다. 이 대목에서 ‘싯다르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고타마 싯타르타(석가모니)는 왕이 될 수 있는 왕자의 고귀한 신분에서 스스로 고행을 시작했다. 헤르만 헤세가 쓴 ‘싯다르타’(박병덕 역·민음사)를 통해 다양성을 배제한 것에서는 통일성이 나올 수 없고, 창조도 클래식도 모두 진리라는 것을 생각해보자.
이 책을 읽을 때는 무엇보다 정독과 깊은 사색이 필요하다. ‘과연 나라면 이런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 라는 의문과 질문을 함께 던지는 사유의 자세로 읽는 것이 필요하다.
시대의 문필가였던 헤세가 말하고 싶은 자기성찰은 언제나 체험으로부터 이루어지며, 그 체험이 바탕이돼 글쓰기로 완성된다. 따라서 그가 ‘싯다르타’에서 말하는 철학은 그 어느 종교가 아니라 스스로 체득한 개인적, 독자적인 것이다.
바로 그런 독자적인 것을 창조적인 것으로 바꾸는 것은 조용히 지켜보면서 깊이 있는 한마디를 하는 자세에서 나온다. 오늘날 요구되는 바도 그것이다.
최근 아이들이 성장해 감에 있어서, 아이들의 꿈에 대해 생각하면 ‘그래도 내 아이가 하고 싶은 것’ 이다. 이는 욕심껏 할 수 있는 것과 노력하는 것과 차이에 대한 고민도 함께 던지는 것이다. 한 땀 한 땀 노력하면 고행까지는 아니어도 자신을 돌아보면서 사는 최소의 사유를 생각하는 6월을 맞았으면 한다. 문의(031)257-5067
전방하 동화작가·‘독서특훈하나로’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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