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을 살아가는 모든 이들이 원더보이
소위 작가로(여기서 작가는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사람으로 본다) 살아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작가의 파란만장한 삶이나 눈물없이 들을 수 없는 구구절절한 인생살이 정도가 든든한 빽(?)으로 있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작가는 찢어지게 가난한 살림살이에 평탄치 않은 가정사까지 중첩된 외계인이 아닐까, 혹은 뭔가 인생을 달관할 만한 극적인 사건이나 사고가 수두룩 할 것 같은 편견을 갖게 된다. 그런 면에서 소설가 김연수(42)는 예외적인 인물이다. “너 뭐 쓸게 뭐가 있냐”고 물으면 김연수는 “마땅한 게 없었다”고 한다.
경북 김천에서 빵집 막내로 태어난 작가는 모범생으로 학창시절을 보냈다. 공부도 김천 바닥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수재였다.
부잣집 아들은 아니었지만 서울 대학생활도 등록금 걱정없이 다니고 군대에서도 학력이 가장 좋다는 이유로 대대장 관사당번으로 차출된, 사랑하는 여자와 결혼해서 딸 낳고 살아가는 평범한 40대의 얼굴이 바로 김연수다. 소설가치곤 어딘가 모르게 평범하고 밋밋하다. 그런 그가 어찌하여 2012년 대한민국에서 꽤 잘나가는 작가로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고등학교 시절까지만 해도 백일장은커녕 작문시간에도 글을 잘 쓴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김연수의 작가 인생은 반전이다. 봄바람이 제법 알싸하게 불었던 3월 첫째주, 일산에서 신작 장편소설 ‘원더보이’를 핑계로 인생 풀스토리를 들어봤다.
모범생·평범한 집안·순탄한 인생
한때 대중음악평론가·기자생활
‘끄적이기’ 시작한 것이 인생을 바꿨다
빵집 막내아들, “천문학자가 되고 싶었다”
“어머니의 고향이 일본 치바현이다. 그래서 다른 애들이 ‘하나 둘 셋’을 배울 때, 나는 ‘이치 니 산시’를 배웠다. 어머니의 좋은 유전자를 많이 받는 경우다.
예를 들어 크게 놀라지 않는 성격도 어머니를 닮았다. 김천역 앞 빵집아들이었지만 우리집 빵은 맛이 없었다. 맛없는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80년대 후반 유럽식 빵을 앞세운 대형 빵집들이 김천에 들어오면서 생각했다. ‘곧 우리 빵집이 망하겠구나.’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입에서 살살 녹아 없어지는 대형 빵집 케익맛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평범하게, 큰 어려움없이 자라던 김연수는 수학만이 최고의 언어라고 믿었던 시절, 천문학자가 되고 싶었다. 천문학자와 소설가, 거리가 멀다.
1993년 성균관대학교 영문과 3학년 때 시인이 된 김연수는 1994년 장편소설 ‘가면을 가리키며 걷기’로 제3회 작가세계문학상을 수상하며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시작한다.
한때 대중음악평론가로 활동하기도 했고 기자생활도 했던 그는 꿈과 상관없이 자연스럽게, 혼자 할 수 있는 일이었기에 ‘끄적이기’ 시작한 것이 그의 인생을 바꿨다고 고백했다.
그냥 퇴근 후 밤 11시부터 새벽 2시까지 돈도 명예도 가져다 주지 않을, 사회나 문학을 쇄신하는 사상을 담지도 못할 게 분명한 장편소설을 쓰고 있었다. 심리적 가난을 느껴본 적이 없다는 작가, 그럴듯한 스토리가 없을 것 같은 작가는 신기하게도 이름을 알리고, 이름을 날렸다. 대한민국 작가로 말이다.
“시인은 노력해서 되는 게 아니다. 시인(人)이 먼저 되어야 하고 타고 나는 것이 있는데 소설가의 경우 방해받지 않은 시간이 많이 필요하다.
나의 경우 ‘노력형 소설가’에 가깝고 ‘24시간형 소설가’에 해당한다.” 시인에서 소설가로 옷을 바꿔 입은 그는 ‘나는 유령작가입니다’, ‘밤은 노래한다’, ‘세계의 끝 여자친구’, ‘7번 국도’,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굳빠이, 이상’ 등 장편소설, 소설집 등을 꾸준히 발표하면서 소위 ‘3만~5만 작가’ 대열에 합류했다.
전통적 소설 문법의 자장 안에서 끊임 없이 새로운 소설적 상상력을 실험하고 허구와 진실,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넘나드는 작가 김연수는 문학성을 갖춘데다 인지도가 높고 열혈고정독자층을 확보하고 있어서 최소한 3만부에서 5만부의 판매량은 기대할 수 있는 말 그대로 ‘시장성’이 좋은 작가로 평가받고 있다.
원더보이, “글을 쓰게 되어 있다”
‘김연수’라는 소설가에게 이제 다른 수식어는 불필요해 보인다. 그는 글을 쓰는 사람이고, 글을 쓰게 되어 있는 사람이다. 그렇게 살게 되어 있는 사람이다.
글을 쓰면서 살게 되어 있는 김연수가 ‘밤은 노래한다’(2008) 이후 4년 만에 새 장편소설을 선보였다. 지난 2008년 봄, 청소년문예지 ‘풋’에 연재하기 시작해 끝을 비워놓은 상태로 연재를 끝냈던 ‘원더보이’가 연재를 중단한 지 꼭 2년 만에,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났다.
‘원더보이’ 정훈의 이야기는 80년대를 배경으로 한다. 1984년, 15살 소년 정훈은 트럭에서 과일을 파는 아버지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교통사고를 당하고, 정훈이 본 마지막 아버지의 얼굴은 우주비행사처럼 밤거리의 불빛들을 향해 나아가던 그 옆모습이 된다.
사고 후, 아버지는 ‘애국애족의 마음으로’ 남파간첩의 차량을 향해 뛰어든 애국지사가 되어 있고, 혼수상태에 빠졌다가 ‘대통령 각하 내외분을 비롯한 각계각층 모든 국민들의 간절한 기원에 힘입어’ 일주일 만에 깨어난 정훈에겐 사람들의 속마음을 읽는 초능력이 생긴다. 이제 정훈에게는 그전과는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자신을 낳다가 죽은 줄로만 알았던 엄마의 존재가 새롭게 떠오르고, 취조당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읽기 위해 매일같이 고문실에 들어가야 했던 재능개발실에서, 자신을 아버지처럼 믿고 따르라던 권 대령에게서 도망쳐나온 뒤,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세상에서 제일 ‘FB(Fire Bottle, 화염병)’를 잘 던진다는 선재 형, 자신 때문에 첫사랑이 죽었다고 생각하고 어느 순간부터 남장을 하고 다니는 강토형(희선씨), 자조(自助)농장을 꾸려가고 있는 무공 아저씨, 해직기자 출신으로 작은 출판사를 운영하고 있는 재진 아저씨까지…. 저마다 극복하기 어려운 상처를 가지고 있는 인물들의 사연들 속엔 우리가 지나온 그 시절이 있다. 지금으로선 상상하기 어려운 그런 일들.
그리고 정훈은 조금씩 어른이 되어 간다.
‘원더보이’는 언뜻 봐선 판타지소설과 성장소설을 혼합한 것 같다. 하지만 김연수식 스타일을 접하지 않은 독자들라면 다소 어려울 수도, 부담스러울 수도 있다. 하지만 정훈이가 각자의 아픔을 끌어안고 살아가는 이들을 만나면서 겪는 과정이 곧 인생이고 성장이다. 김연수 작가는 말한다.
“멀리 지구 바깥에서 바라보면 혼자 이불을 뒤집어쓰고 우는 사람도, 너무 힘들어 고개를 숙인 사람도 끝이 없이 텅 빈 우주공간 속을 여행하는 우주비행사들처럼 보일 거다.
그렇다면 어떤 일이 있어도 이건 멋진 여행이 될 수밖에 없다. 누구나 한번은 다른 누군가를 사랑할 테니까, 우리는 다들 최소한 한 번은 사랑하는 사람과 우주 최고의 여행을한 셈이니까. 이게 고통과 슬픔을 받아들이는 나의 방식이다.”
계속 소설을 쓰고 싶다. 그리고 많이 쓰고 싶다.
아니 제일 많이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 40권쯤…
마라토너 “다作에 도전하다”
김연수에게 일산은 제2의 고향이나 마찬가지다. “김천에서 20년 살다가 서울로 올라와 주로 북한산 주변 삼청동, 성북동, 정릉 등지에서 살았는데 우연히 서대문 홍은동을 갔는데 연탄집이라 (누나가) 반대를 했다. 그냥 3호선 전철타고 정발산에서 내렸는데 허허벌판이라 어찌할바 몰랐다.
1995년 일산에 들어와 17년째 살고 있는데 90년대 일산이 잠만 자는 뜨내기 분위기였다면 이젠 동네 꼴이나서 이야기가 있는 도시가 됐다.”이처럼 작가는 일산의 변화와 궤를 같이 했다. 그리고 지금 열 세살난 딸 열무(예명)와 또다른 꿈을 꾸고 있다. “40대 넘어선 다작을 하고 싶다.
계속 소설을 쓰고 싶다. 20년을 소설가로 살았는데 10년 뒤에 소설을 더 쓰면 어떻게 될까 궁금하다. 근대문학 이후 현재까지 국내에서 제일 많이 쓴 사람이 누구인지 모르겠지만 제일 많이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
40권쯤. 그 누구도 넘지 않은 선이다. 딸의 사주를 보니 부모의 덕을 크게 본다고 하던데(하하).”단체운동을 별로 안 좋아하고 경쟁없이 완주만 하는 마라톤을 즐기는 김연수라면 충분히 가능한 목표라는 생각이 든다. 튼실한 문학적 내공으로 오로지 글쓰기로만 승부해온 김연수의 그간 행보는 동세대 작가들 가운데 가장 뚜렷하고 화려했다.
6권의 장편소설과 4권의 소설집에 한국을 대표하는 크고 작은 문학상들의 잇단 수상까지. 신작이 나올 때마다 열혈 팬심은 물론이요, 문단 안팎의 신망이 그만큼 두터웠던 게 사실이다. 그 힘을 바탕으로 오늘도 그는 소설을 쓰고, 인생을 쓴다.
김연수는 왜 다작에 도전할까? 의문이 들었다. 그의 산문집 ‘청춘의 문장들’에서 찾아봤다.“여전히 삶이란 내게 정답표가 뜯겨져 나간 문제집과 비슷하다. 어떤것인지 짐작할 수는 있지만. 그게 정말 맞는 것인지 확인할 방법이 없다.”
글 _ 강현숙 기자 mom1209@kyeonggi.com 사진 _ 김시범 기자 sbkim@kyeong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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