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용선의 세계속으로 ③]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

마리 앙투와네트 웃음소리 들리는 듯

 

베르사유는 프랑스의 수도인 파리에서 약 23km 떨어진 곳에 있는 작은 도시다. 이곳에는 17세기 말부터 18세기에 걸친 프랑스 절대 왕정의 상징인 베르사유 궁전이 있다. 바로크 양식으로 지어진 베르사유 궁전은 상당히 호화로운 궁전으로 그 규모와 화려함이 보는 이들의 눈을 휘둥그렇게 한다. 조형미를 자랑하는 정원과 분수대 그리고 궁전 내의 왕의 방, 예배당, 거울의 방, 전쟁의 방 등이 대표적이다.

 

루이 14세 역작 50년만에 완공…프랑스 혁명의 기폭제 ‘역사의 아이러니’

 

베르사유 궁전을 짓게 된 사연은 흥미롭다. 루이 14세는 섭정에서 벗어나 23세부터 직접 정치를 했는데 살고 있는 궁전들이 마음에 들지 않아 교외에 있는 생제르맹의 별궁에서 지내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재무장관인 푸케의 집에 초대받아 간 루이 14세는 너무나 잘 지어진 그의 저택에 몹시 자존심이 상했다.

 

한낱 신하에 불과한 푸케가 호화저택을 짓기위해 분명히 불법으로 돈을 모았을 것으로 단정한 왕은 푸케를 체포해 그가 죽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었다.

 

그리고 푸케의 저택을 지은 건축가인 르 보, 실내 장식가인 르 블랑, 정원사인 르 노트로를 시켜서 아버지인 루이 13세의 별장이 있던 베르사유에 휼륭한 궁전을 짓도록 명령했다.

 

루이 14세는 미처 완공도 안된 베르사유 궁전을 1672년 왕궁으로 정했으며 프랑스의 정치, 문화, 사교의 중심지로 사용했다.

베르사유 궁전에서 왕은 아침 8시에 일어나 주치의를 접견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이어 시종관으로부터 밤 사이에 일어난 주요 뉴스와 일정을 보고 받고, 이틀에 한번 꼴로 면도를 했다고 한다.

 

베르사유 궁전은 건축가인 망사르에 의해 그후에도 계속 공사가 진행됐으며 18세기 돼서야 비로소 현재와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된다.

 

1662년 공사를 시작해 50여 년만에 완성된 베르사유 궁전은 세계에서 가장 큰 궁전 중의 하나로 무려 2만명이 입장할 수 있다.

 

베르사유궁은 건축할 때에는 수많은 노동자들이 동원됐다. 나라의 이름난 건축가, 화가, 조각가, 원예가, 공예가들이 총동원된 것은 말할것도 없다.

 

늪지대이던 곳을 전국에서 끌어온 흙으로 메꾸어 기초를 다졌고, 나무를 옮겨 심었으며, 강의 흐름을 바꾸어 1천여개의 분수를 만들었다.

또한 거대한 펌프를 사용해 센 강의 물을 150m나 끌어올리는 등 대대적인 공사를 벌여 자연을 개조해 놓았다. 베르사유 궁전은 프랑스 혁명의 기폭제를 제공했던 곳이기도 하다.

 

왕이나 귀족들에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궁전이었으나 굶주린 일반 국민에게는 분노의 대상이었다. 한참 공사가 진행될 때에는 하루 평균 3만 명의 국민이 무보수로 동원됐다. 공사도중 전염병이 돌아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갔지만 왕은 이런 사실을 철저히 비밀에 붙이도록 했다.

 

국민의 고혈을 쥐어짠 베르사유 궁전은 국민들의 불만을 누적시켰다.

루이 14세는 지방의 봉건영주들의 반란을 두려워해 주기적으로 이들을 베르사유 궁전으로 불러 밤낮을 가리지 않고 수백 명이 모이는 성대한 연회를 베풀었다. 결국 이러한 사치는 생활고에 시달리던 국민들의 반감을 샀고 1789년 왕정을 타도하는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게 된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루이 14세 때 짓기 시작해 1789년 대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증축과 개축을 계속한 베르사유 궁전의 건축에는 천문학적인 금액이 들어갔다.

 

베르사유 궁전은 1774년 즉위한 루이 16세 재위시절에 비로소 완공됐다. 하지만 그는 화려한 궁전에서 제대로 살아보지도 못하고 분노로 가득한 국민들에 의해 콩코드 광장에서 왕비인 마리 앙투아네트와 함께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베르사유 궁전의 정문에 들어서면 먼저 우뚝 서 있는 기마상을 만나게 된다. 말을 탄 사람은 베르사유 궁전을 짓도록 명령한 루이 14세이다. 그는 어머니와 할머니로부터 예술을 사랑하는 마음을 갖도록 교육을 받았으며 왕으로 있으면서 아름다운 건축물을 많이 세웠다.

 

말 탄 모습의 루이 14세의 동상을 지나면 베르사유 궁전의 본관이 나타난다. 궁전 1층에는 예배당이 있는데 음악의 신동이라고 불린 모차르트가 연주를 하고 왕족들이 결혼식을 한 곳으로 유명하다. 루이 14세는 이곳에서 날마다 오후 1시가 되면 미사를 드렸다고 한다.

 

예배당 옆에는 6개의 방으로 꾸며진 왕의 정전이 있다. 정전은 베르사유 궁전에선 중요한 장소로 왕들이 신하와 더불어 국사를 의논했던 장소이다. 루이 14세는 이 정전에서 1주일에 세 차례 회의를 가졌다고 한다.

 

1층에 있는 6개의 방은 밤마다 화려한 파티가 열리는 방, 당구를 치는 방,음악회 방, 게임 방 등 제각기 용도가 달랐다. 외국 손님을 맞이하기 위한 방도 있는데, 이곳에는 3m나 되는 은으로 만든 의자가 놓여 있다.

 

베르사유 궁전 2층으로 올라가면 화려함이 돋보이는 ‘거울의 방’이 있다. ‘전쟁의 방’과 ‘평화의 방’ 사이에 자리한 곳으로 사방이 온통 거울로 장식돼 있다. 400여장의 거울과 대리석, 샹들리에의 조화로 이루어진 이 방에는 전쟁기념 기록화 및 역대 왕과 왕비의 초상화가 전시돼 있다.

 

방 길이는 무려 70m나 된다. 창문을 통해 들어온 햇빛이 거울에 반사돼 부서지는 모습은 눈이 시릴 지경이다. 당시 밤이면 이 곳에서 수백개의 촛불을 밝힌 화려한 파티가 열렸다고 한다.

 

성대한 연회가 베풀어졌던 프랑스 최고의 사교장이었으며 루이 15세의 손자인 루이 16세가 마리 앙트와네트와 피로연을 가진 장소이기도 하다.

2층에서는 왕과 왕비가 사용하던 침실도 구경할 수 있는데 기이한 것은 침대 길이가 생각보다 짧다는 사실이다. 원래 왕의 키가 작았기 때문이라는 설과 자객의 침입에 대비해 왕이 언제든지 깨어날 수 있도록 상반신을 벽에 기대고 잤기 때문이라는 설 등이 있다.

 

궁전 내에는 오페라 극장도 따로 있는데 루이 16세와 마리 앙트와네트가 이곳에서 결혼 피로연을 가졌고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이 방문했을 때도 여기서 저녁식사를 했다고 한다. 지금도 상하원의 회의장소로 자주 이용된다.

 

베르사유 궁전이 있는 곳은 원래 늪이었다. 때문에 엄청난 양의 흙을 가져다 메우고 나무를 옮겨 와 심어야 했다. 분수를 만들기 위해 강의 물줄기를 바꾸고, 거대한 펌프를 사용해 센 강의 물을 끌어와야 했다. 베르사유의 궁전 뒤쪽에는 정원이 아주 넓은데 걸어서 3시간 이상 걸린다.

 

화단과 잔디밭, 숲과 샘, 조각상 등이 잘 배치된 프랑스 정원을 대표하는 곳이다. 베르사유 궁전의 정원은 루이 14세의 방에서 서쪽으로 뻗은 기본 축을 따라 라톤의 분수, 아폴론의 분수, 십자 모양의 대운하 등이 자리한다.

 

대운하 북쪽 끝에는 그랑 트리아농과 프티 트리아농이라 불리는 작은 규모의 궁이 2개 있다. 그랑 트리아농은 루이 14세가 퇴임 후 부인과 여생을 함께 하기 위해 지은 궁전이고, 프티 트리아농은 마리 앙트와네트가 특히 아끼던 별궁으로 영국풍의 정원에 중국의 산수를 옮겨 놓은 듯한 분위기이다. 정원 한쪽 구석에는 아담한 농가들이 모여 있어 그 아름다움을 더해주고 있다.

 

정원 뒤쪽에는 폭 62m에 길이 1천650m나 되는 운하가 있다. 넓은 정원에 물을 대기 위해 강물을 끌어들여 만든 것이다. 과거 귀족들은 이곳에 배를 띄우고 뱃놀이를 즐겼다.

 

정원에는 라콘의 샘과 아폴론의 샘이 있는데 그 사이로는 그리스와 로마의 신화에 나오는 신들을 새긴 조각상이 배치돼 있다.

 

이처럼 특유의 장관을 이룬 베르사유 궁전은 전체가 하나의 예술품이라고 해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다.

 

글·사진 _ 여행 칼럼니스트 허용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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