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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용선의 세계문화기행]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
오피니언 허용선의 세계문화기행

[허용선의 세계문화기행]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

베르사유는 프랑스의 수도인 파리에서 약 23㎞ 떨어진 곳에 있는 작은 도시다. 이곳에는 17세기 말부터 18세기에 걸친 프랑스 절대 왕정의 상징인 베르사유 궁전이 있다.

 

베르사유 궁전을 짓게 된 사연은 흥미롭다. 루이 14세는 섭정에서 벗어나 23세부터 직접 정치를 했는데 살고 있는 궁전들이 마음에 들지 않아 교외에 있는 생제르맹의 별궁에서 지내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재무장관인 푸케의 집에 초대받아 간 루이 14세는 너무나 잘 지어진 그의 저택에 몹시 자존심이 상했다. 한낱 신하에 불과한 푸케가 호화저택을 짓기 위해 분명히 불법으로 돈을 모았을 것으로 단정한 왕은 푸케를 체포해 그가 죽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었다. 그리고 푸케의 저택을 지은 건축가인 르 보, 실내 장식가인 르 블랑, 정원사인 르 노트로를 시켜서 아버지인 루이 13세의 별장이 있던 베르사유에 휼륭한 궁전을 짓도록 명령했다. 루이 14세는 미처 완공도 안된 베르사유 궁전을 1672년 왕궁으로 정했으며 프랑스의 정치, 문화, 사교의 중심지로 사용했다.

 

1662년 공사를 시작해 50여 년만에 완성된 베르사유 궁전은 세계에서 가장 큰 궁전 중의 하나로 무려 2만명이 입장할 수 있다.

 

베르사유 궁전은 프랑스 혁명의 기폭제를 제공했던 곳이기도 하다. 왕이나 귀족들에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궁전이었으나 굶주린 일반 국민에게는 분노의 대상이었다. 한참 공사가 진행될 때에는 하루 평균 3만 명의 국민이 무보수로 동원됐다. 나라의 이름난 건축가, 화가, 조각가, 원예가, 공예가들이 총동원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국민의 고혈을 쥐어짠 베르사유 궁전은 국민들의 불만을 누적시켰다. 루이 14세는 지방의 봉건영주들의 반란을 두려워해 주기적으로 이들을 베르사유 궁전으로 불러 밤낮을 가리지 않고 수백 명이 모이는 성대한 연회를 베풀었다. 결국 이러한 사치는 생활고에 시달리던 국민들의 반감을 샀고 1789년 왕정을 타도하는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게 된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베르사유 궁전은 1774년 즉위한 루이 16세 재위시절에 비로소 완공됐다. 하지만 그는 화려한 궁전에서 제대로 살아보지도 못하고 분노로 가득한 국민들에 의해 콩코드 광장에서 왕비인 마리앙투아네트와 함께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베르사유 궁전이 있는 곳은 원래 늪이었다. 때문에 엄청난 양의 흙을 가져다 메우고 나무를 옮겨 와 심어야 했다. 분수를 만들기 위해 강의 물줄기를 바꾸고, 거대한 펌프를 사용해 센 강의 물을 끌어와야 했다. 베르사유의 궁전 뒤쪽에는 정원이 아주 넓은데 걸어서 3시간 이상 걸린다. 화단과 잔디밭, 숲과 샘, 조각상 등이 잘 배치된 프랑스 정원을 대표하는 곳이다. 베르사유 궁전의 정원은 루이 14세의 방에서 서쪽으로 뻗은 기본 축을 따라 라톤의 분수, 아폴론의 분수, 십자 모양의 대운하 등이 자리한다.

 

대운하 북쪽 끝에는 그랑 트리아농과 프티 트리아농이라 불리는 작은 규모의 궁이 2개 있다. 그랑 트리아농은 루이 14세가 퇴임 후 부인과 여생을 함께 하기 위해 지은 궁전이고, 프티 트리아농은 마리 앙트와네트가 특히 아끼던 별궁으로 영국풍의 정원에 중국의 산수를 옮겨놓은 듯한 분위기이다. 정원 한쪽 구석에는 아담한 농가들이 모여 있어 그 아름다움을 더해주고 있다.

 

특유의 장관을 이룬 베르사유 궁전은 전체가 하나의 예술품이라고 해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다.

 

허용선의 여행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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