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 담은 필름은 여전히 돌아간다
경동(京洞)은 ‘경성(서울) 가는 길목에 있던 동네’라는 뜻에서 이름을 얻었다.
사람들은 경동이란 행정명보다 흔히 ‘싸리재’라고 불렀다. 뜻풀이를 하면 ‘싸리가 많은 언덕’이란 의미를 담고 있지만 실제로 싸리가 많았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향토적인 이름과 달리 이곳은 한때 최신 유행을 선도하던 인천 최대의 번화가였다.
할리우드 키드의 낭만 ‘애관극장’
시계바늘을 100여 년 전으로 돌려보자. 제물포항에 짐을 내린 벽안(碧眼)의 외국인은 서둘러 서울로 향한다. 말잡이는 싸리재로 길을 잡는다. 우마차 한 대 겨우 드나들 수 있는 길 초입에 들어서니 거름 냄새가 코를 찌른다.
주변은 온통 중국인들이 경작하는 양배추 밭이다. 오른쪽 언덕에는 주변 풍광과는 어울리지 않는 서양식 건물이 하나 서 있다.
파리 외방선교회가 지은 제물포본당(답동성당)이다. 고개길을 조금 더 오르니 멀리 시커먼 연기를 내뿜으며 달리는 기차의 모습이 눈에 들어 온다. 얼마 전에 개통한 경인철도이다.시계바늘을 50여 년 전으로 당겨본다. 이제 전쟁은 끝나고 사람들은 폐허가 된 땅에 다시 삶의 씨앗을 파종하기 시작했다.
싸리재에도 활력이 돌기 시작했다. 일제강점기 때부터 모던보이, 모던걸의 무대였던 경동에 양복점과 양화점이 다시 문을 열기 시작하더니 길 양 옆으로는 상점들이 빼곡히 줄을 이었다.
긴 담 모퉁이 길 입구 언덕에 미국 감리교의 도움으로 지은 기독병원이 개원하고 주변에 개인병원도 한 집 걸러 하나씩 생겼다. 더불어 약방과 약국도 속속 문을 열면서 이곳은 늘 사람들로 붐볐다.
경동에 오면 아직도 옛 추억을 고스란히 곱씹어 볼 수 있는 곳이 있다.바로 애관극장이다. 이 극장은 공인받고 있지는 못하지만 협률사(協律社)라는 우리나라 최초 공연장의 뿌리를 품고 있다.
애관극장 덕분에 일제강점기 경동거리는 ‘복지강화’(합동영화사),‘날개 없는 천사’(국보영화사) 등이 제작 보급될 만큼 한동안 시네마 천국의 역할을 하기도 했다.
한때 대한민국에서 제일 큰 스크린을 가진 애관극장에서 당대 스타였던 신성일과 엄앵란이 무대인사를 하던 날 이 일대 교통이 마비됐다는 것은 이제 전설로 남아 있다. 애관극장은 지난 2004년 ‘살아남기 위해’ 5개의 스크린을가진 멀티플렉스로 변모했다.
이곳에서 두 시간 내내 까치발을 들고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보았던 헐리웃 키드들 에게는 애관극장의 존재 그 자체 만해도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양복, 드레스에 자리를 물려주다
극장 뒤 언덕에 오르면 신신예식장이 있다. 이 예식장은 6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80년대 까지만 해도 인천에서 ‘좀 폼나게’ 결혼식을 올린다고 하면 거의 신신예식장에서 치렀다. 이예식장에는 정원이 딸려 있어 예식이 끝나면 야외마당에서 단체사진을 찍었다.
예식장이 비어 있는 날짜를 찾아 결혼날짜를 잡아야 할 정도로 인기 있었던 곳이었지만 요즘 청첩장에선 신신예식장 활자를 보기 어렵다. 이름도 신신컨벤션웨딩홀로 바뀌었고 우아했던 그 모습도 여러 차례의 증축을 통해 사라지고 말았다.
신신의 명성은 시들해졌지만 예식장은 이 거리에 웨딩문화의 씨앗을 뿌렸다. 길 양편으로 드레스 숍이나 한복 그리고 사진관 등 결혼 관련 가게들이 하나둘씩 생기기 시작하더니 몇 년 전 부터는 아예 ‘웨딩거리’로 명명되기에 이르렀다.
번성했던 경동거리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었던 상점은 양복점이었다. 한미라사, 김테일러, 화신양복점, 서울라사, 잉글랜드양복점, 자유라사, 신라라사, 백양테일러, 대흥양복점, 월드양복점, 현대라사 등 한창 때는 30개의 양복점이 성업 중이 었다. 멋쟁이 신사들이 한 벌 쫙 빼입고 활보하던 거리에 이제 양복점 간판을 보기가 힘들어졌다. 기성복에 밀리고 백화점에 밀린 것이다.
모퉁이 길에서 눈에 띠는 이수일양복점에 무작정 들어갔다. 한가롭게 TV를 보던 이수일(68) 사장에게 옛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하자 “다 잊혀진 이야기인데 뭘…” 하면서 마득치 않은 눈치이다. 이것저것 양복에 대한 이야기를 슬쩍 던지자 그는 얘기 보따리를 풀기 시작했다. “한창 때는 재단사, 봉제사 등 20명을 두고 장사를 했지. 이런 설 명절 때는 몇일 밤을 새워서 일하곤 했는데… 한때 영화 예고편 앞에 양복점 광고가 몇 개 씩 붙은 적도 있었지.”손님 한 명이 문을 밀고 들어왔다. 오늘이 가봉하는 날이란다.
가봉, 얼마나 오랜만에 듣는 단어인가. 이내 줄자를 목에 건 이사장의 눈빛은 장인의 눈빛으로 변한다. 돌리고 재고 올리고.40년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의 몸통 치수를 쟀을까. 요즘 맞춤 양복 한 벌 값은 대략 100만원선. 단골인 듯한 손님은 스스로 특이 체형이라면서 양복을 꼭 맞춰 입는다고 한다. “아마 여기에 제 아버님 치수 장부도 있을 겁니다.” 오래된 장부를 들춰보면 체형이 비슷한 부자(父子)들이 대를 이어 양복을 맞춰 입었음을 알 수 있으리라.
노른자위 동동 뜬 쌍화차
차 한잔 권하는 이수일 사장에게 대신 이 동네에서 좀 오래된 다방을 알려달라고 하자 바로 양복점 옆 골목에 있는 학다방을 소개한다. 인천에서 연조가 있는 다방 중의 하나라는 설명이다.
나무문을 밀고 들어가 보니 색깔있는 어둔 조명 밑 탁자와 의자 등의 소품이 70년대 다방 분위기 그대로다. ‘궂은비 내리는 날 그야말로 옛날식 다방에 앉아 도라지 위스키 한잔에다 짙은 섹소폰 소릴 들어보렴’ 최백호의 노래가 생각났다. 마침 비도
오겠다 도라지 위스키 대신 쌍화차를 한잔 시켰다. 잠시 후에 노란자위가 둥둥 뜬 쌍화차가 탁자에 놓였다. 아, 계란 띄운 쌍화차가 이곳에서는 아직도 살아있구나.
약을 사기 위해 문밖으로 줄을 길게 선다면 이해가 갈까. 그런 풍경이 심심치 않게 연출되었던 곳이 동서대약국과 싸리재 약국이었다. 기독병원을 중심으로 김내과, 이이비인후과 등 십수개의 개인병원이 함께 의료타운을 이룬 덕을 톡톡히 보았다.
인근 김포, 강화, 옹진 섬 사람들이 시내를 방문한 차에 약을 박스나 봉지채로 사가곤 했다. 동서대약국의 간판에는 ‘Since 1946’ 이란 글자와 함께 옛모습의 사진이 걸려있다.
옛 주인은 미국으로 이민가고 지금은 이 집의 역사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약사가 세들어 운영하고 있다고 한다. 옆의 싸리재 약국은 경동 지역에서 ‘싸리재’라는 이름을 쓰는 거의 유일한 집이다. 그렇게 싸리재는 잊혀져가고 있다.
글 _ 유동현 굿모닝인천 편집장 사진 _ 김성환 포토저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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