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걷다] 인천 중구 인현동

얄개들의 웃음소리 들리는 듯…

 

동인천역 건너편의 중구 인현동은 한때 인천 최고의 번화가였다.

 

제물포고, 인천여고 등 학교가 밀집해 있던 스쿨존이었고 인천의 거의 모든 시내버스가 경유하던 교통의 중심지였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지하상가의 출입구였던 덕분에 항상 사람들로 북적거렸던 곳이기도 하다.

 

도시개발이 외연을 넓혀가면서 이제는 시간이 멈춰서있는 부도심으로 전락했지만 동네 곳곳에 교복세대들의 아련한 추억이 서려 있다.

 

제물포고, 인일여고, 인천여고, 인성여고, 인천여중, 상인천여중, 인성여중, 축현초등학교. 인현동 일대에 있던 학교들이다.

 

이 지역 쇠락의 결정타는 ‘화재사건’이었다 1999년 10월 노래방에서 화재가 발생

그곳에 있던 10대 청소년 등 50여 명의 귀중한 생명을 앗아갔다

이렇게 많은 학교가 반경 300m 이내에 있는 예는 우리나라에서는 전무후무했다.

 

70, 80년대 등하교 시간에 이곳은 마치 거대한 펭귄떼가 이동하는 모습을 연상시킬 만큼 온통 교복 입은 학생들뿐이었다. 그러다보니 학생들과 관련된 사업이 번창했다.

 

다른 도시에서는 보기 드문 대형 문구점과 체육사를 비롯해 화방, 학원, 탁구장, 사진관, 분식집 등이 성업을 이뤘다.

 

용동마루턱을 기준으로 신포동과 경동은 어른들의 공간이요, 인현동은 얄개들의 천국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다.

 

특히 미국 LA까지 진출한 쫄면의 고향을 자랑하듯 분식집은 한집 걸러 하나씩 있었다. 명물당, 만복당, 맛나당 등 ‘당’자 돌림의 분식집은 먹성 좋은 얄개들의 방앗간 역할을 톡톡히 했다.

 

전성기를 구가하던 중 90년대 들어서면서 도시개발에 의해 한두 학교가 교외로 터전을 옮기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남은 학교가 절반도 되지 않는다.

 

점차 주변 상가도 예전만큼 활기를 띠지 못했다. 이 지역이 쇠락의 결정타를 맞은 것은 ‘화재사건’이었다.

1999년 10월 30일 저녁 인현동 분식 골목에 위치한 상가건물 1층 노래방에서 내부수리 중 화재가 발생, 2층과 3층으로 불이 번져 그곳에 있던 10대 청소년 등 50여 명의 귀중한 생명을 앗아갔다. 그 후유증으로 이 지역은 한동안 인적이 끊기며 적막감마저 나돌았다.

 

화재 발생 10년, 화상은 어느 정도 치유가 되었고 축현초등학교 자리에 인천학생교육문화회관이 들어서면서 청소년들의 재기발랄한 발길이 다시 이어지고 있다.

 

‘별‘처럼 보이던 사람들이 드나들던 ‘별제과’

서울에 종로서적이 있었다면 인천엔 대한서림이 있다. 70, 80년대 젊은이들의 모임은 책방 앞에서 먼저 만나 장소를 옮기는 아날로그식 만남이었다.

 

동인천 지하상가 출입구 바로 앞에 있고 전철역에서 내리면 한 눈에 보이던 5층 건물 대한서림은 인천의 대표적인 만남의 장소이자 랜드마크였다.

 

핸드폰이 없던 시절 대한서림에서 일단 만나자고 약속했지만 무슨 사정인지 끝내 나타나지 않는 상대를 기다리며 읽은 책이 짧게는 시집이요, 길게는 소설이었다.

 

대한서림이 문을 연 지 어언 56년. 우리나라 책방 역사에 쉽지 않은 세월이다. 인천의 7080세대들은 이 책방에서 ‘씨의 소리’, ‘해방 전후사의 인식’ 같은 돌베게 마냥 묵직한 책을 구해 읽기도 했고 ‘꽃들에게 희망을’ 같은 달콤한 책을 읽으며 사랑을 꿈궜다.

 

아직도 그 자리를 지키며 반백년 이상의 세월을 보낸 대한서림은 결코 외롭지 않다. 바로 앞에 있는 동인서관도 시간을 함께 했기 때문이다. 인천에 이런 서점들이 존재한다는 것이 그저 고마울 뿐이다.

 

인현동 삼치거리는 주머니 사정이 가벼운 대학생들과 직장인들이 저녁이면

삼치와 막걸리로 허기를 달래며 개똥철학을 설파하고 시국을 논했던 곳이다

현재 대한서림이 있는 건물은 원래 별제과 건물이었다. 별제과는 결혼을 앞둔 양가부모의 격식있는 상견례 자리였을 만큼 70년대 당시 인천 최고의 ‘럭셔리’ 양과점이었다. 말 그대로 이 곳을 드나드는 사람들은 ‘별’처럼 보이던 시절이었다.

 

이 건물에는 ‘별’ 음악감상실도 있었는데 음악을 통해 새로운 조류를 받아들이던 젊은이들의 발길로 문턱이 닳았다. 한때 문인들이 시낭송회를 개최하는 등 별제과 건물은 동인천 문화예술의 한 공간을 담당하기도 했다.

새 학용품을 확보하라

인천에 백화점이 없던 시절, ‘학생백화점’이란 간판을 내걸고 학생들의 ‘해방공간’ 역할을 했던 곳이 대동학생백화점이다. 1층에는 문구점과 화방, 체육사 그리고 2층에는 DJ가 있는 분식집으로 구성된 복합 건물이었다. 지금으로 이야기하면 ‘숍 인 숍’의 형태였다.

 

아직도 ‘대동학생백화점’이란 간판을 내걸고 있지만 지금은 1층에 문구점과 화방만 운영하고 있다. 50년 역사를 지닌 이곳은 1년 내내 학생들로 붐볐지만 특히 3월 신학기를 앞둔 며칠 전부터 학용품과 체육복을 새로 구입하기 위해 몰려든 학생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마치 포도주 마니아가 보졸레 누보를 손꼽아 기다리듯이 신학기가 되면 올리비아 핫세 같은 외국배우의 사진이 새겨진 새로운 스타일의 학용품을 먼저 확보하기 위해 아침 일찍 백화점의 문이 열리길 기다리는 학생들로 장사진을 이뤘다.

 

한창 때는 줄을 서서 기다려야만 입장할 수가 있었는데 그 줄의 꼬리가 50m는 예사였다.

 

전쟁을 치르듯 어렵게 물건을 확보한 학생들은 2층으로 올라가 DJ가 들려주는 신나는 음악을 들으며 학용품을 사고 남은 우수리 돈으로 분식을 시켜 먹으면서 서로 그날의 전리품을 내놓고 자랑하며 뿌듯해하곤 했다.

 

학교도 많이 떠났고 학생수도 줄었지만 대동백화점 아래쪽으로는 아직도 여러 개의 체육사와 문구점, 그리고 화방이 그대로 남아있어 이곳에 오면 학창시절 깔깔대며 거리를 거닐던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된다.

서민들의 쉼터 ‘삼치 굽는 마을’

인현동에서 전국구의 명성을 얻고 있는 곳은 삼치거리이다. 학생교육문화회관 뒷길은 매일 저녁 고소한 삼치구이 냄새가 진동한다.

 

이 골목길이 삼치거리로 자리잡기 시작한 것은 1966년 ‘인하의 집’이 현재의 자리에 약간 떨어진 곳에서 삼치와 막걸리를 팔면서 부터다. 원래 이곳에는 후에 ‘소성주’라는 인천막걸리의 토대가 된 대화주조라는 양조장이 있었기 때문에 술은 자연스럽게 막걸리가 나왔고 안주로는 인근 부두에서 싼 값에 팔리는 삼치를 튀겨 내놓았다.

 

이후 한두집씩 삼치를 곁들인 막걸리집이 들어서더니 지금은 14개 업소가 성업 중이다. 업소마다 기름에 튀기거나 그릴에 굽는 등 제각각 다른 독특한 맛으로 손님들을 끌고 있는데, 어느 집이든 어른 손바닥보다 큰 삼치를 2∼3토막씩 한 접시에 푸짐하게 담아내고 있다.

 

이 곳은 주머니 사정이 가벼운 대학생들과 직장인들이 삼치와 막걸리로 저녁을 대신하면서 개똥철학을 설파하고 시국을 논했던 곳이다.

 

세월이 지나 이제 중년이 된 그들은 이 골목을 다시 찾아 그 시절의 향수에 젖곤 한다. 막걸리 열풍 덕분에 다시 조명받기 시작했지만 3∼4명이 마음껏 먹어도 1만∼2만원이면 충분할 정도로 세월이 흘러도 서민적 분위기는 여전하다.

 

인심과 맛은 바뀌지 않았어도 거리와 건물의 외관은 많이 바뀌었다. 2001년 10월에 이 거리는 ‘동인천 삼치거리’로 지정되었고 지난해 공공미술프로젝트의 일환으로 간판과 외벽을 치장하기 시작했다.

 

인테리어, 화가 등의 손길을 거치면서 모든 가게의 간판이 ‘작품’으로 거듭났다.

 

이제는 삼치 맛 못지않게 이 거리는 간판구경 코스가 되었다. 심심치 않게 방송을 타거나 아마추어 사진가들의 피사체가 되고 있으며 관련자들의 탐방코스가 되면서 유명세를 타고 있다.

 

글 _ 유동현 굿모닝인천 편집장 사진 _ 김성환 포토저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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