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걷다 -인천 동구 송현동
인천시 동구 송현동은 산을 품고 있고 바다를 끼고 있다. 송현동 사람들은 바다는 공장에 내주고 산으로 들어와 살았다. 수탈과 전쟁에 밀려서 정착한 산등성이의 삶은 늘 고달팠다. 비탈길 만큼이나 그들의 삶도 비탈졌다. 송현동 사람들은 거개가 난민(亂民)과 빈민(貧民) 사이의 삶이었다. 처절한 그 삶을 지탱시켜 준 것은 그 산, 수도국산이었다.
‘민통선’ 수도국산
수도국산은 그들에게 어머니 품이었다. 하나의 산이기에 앞서 그들과 함께 먹고 자고 숨 쉬는 삶의 터전이었다. 송현동 사람들은 하루의 고단한 등짐을 내려놓고 밤새 그곳에 기대어 있다가 다시 다음날 새벽 고갯길을 내려가 ‘전쟁터’로 향했다. ‘삶’이란 바윗덩어리를 지고 오르내렸던 그 사람들은 시지프스였고 그 산은 코카사스산이었다.
수도국산의 원래 이름은 송림산(松林山) 혹은 만수산(萬壽山)이었다. 일제는 1910년 이 산의 꼭대기에 노량진에서 끌어온 물을 저장하는 배수지를 만들었다. 자국 거류민의 식수와 군수공장의 공업용수 그리고 인천항에 정박하는 기선(汽船)에 물을 대기 위한 것이다. 이 배수지를 관할하는 수도국이 생기면서 이 산은 수도국산으로 불리었다.
만수산이 그 몸통에 물을 채움으로써 ‘만수(滿水)’가 된 형국이었다. 수도국산은 근 100년 가까이 민통선(민간인 통제선) 구역이었다. 배수지 바깥으로 철조망이 둘러 처져 있었고 정복을 입은 경비들이 항상 사람들의 접근을 막았다.
당시 동네 어른들은 이렇게 경계가 철저한 것은 배수지가 국가 주요시설로서 만약에 간첩이 물탱크에 독약을 타면 인천시민의 절반이 죽기 때문이라고 얘기하곤 했다.
그러나 높고 촘촘한 철조망일지라도 아이들의 몸을 막진 못했다. 숲이 우거진 배수지는 훌륭한 놀이터였다. 철조망을 뚫은 아이들은 나무총이나 칼을 들고 편을 나눠 총싸움을 했다. 밀림 속에서의 서바이벌 게임이었다.
‘세월’의 때를 덕지덕지 묻힌 유물들
철조망 바깥으로 거대한 판잣집 동네가 산을 중심으로 둥그렇게 형성되었다. 멀리서 보면 마치 시루떡 포개 놓은 듯 산 밑에서 꼭대기까지 한 뼘의 여유 공간도 없이 앞 집 어깨를 타고 올라섰다.
5만5천평에 1천800채의 꼬방집들이 다닥다닥 들어섰다. 안방, 건넛방, 마루할 것 없이 창문을 열면 달과 별을 볼 수 있었던 동네. 서울의 난곡과 쌍벽을 이루던 우리나라 대표적인 달동네 수도국산은 1998년부터 재개발 사업으로 철거에 들어갔고 송현동 사람들은 다시 자신의 터전을 내주고 밀려나갔다. 그 자리에 3천 가구의 거대한 아파트 단지 솔빛마을이 들어섰다. 다행히 배수지 공간은 그대로 살려두고 공원으로 조성했다.
사람은 떠났지만 그들의 애환이 담긴 살림살이들은 2005년에 개관한 수도국산 달동네박물관에 남겨져 있다. 동네가 철거될 때 전국의 고물상이 다 모여 ‘진기한’ 물건들을 수집해 갔다. 뒤늦게 당시 동구청 직원 김철성씨가 중심이 돼서 수집에 나섰다. 궁중이나 양반댁에서 사용된 고고한 유물이 아닌 우리 부모들이 사용했던 세간들이 ‘세월’의 때를 덕지덕지 묻힌 채 박물관으로 갔다. 박물관 전시는 1971년 11월 어느 날 저녁 6시에 맞춰져 있다.
돌산 밑의 수용소촌
골을 사이에 두고 수도국산과 이어진 산이 있었다. 사람들은 그 산을 그냥 ‘돌산’이라고 불렀다. 한때 채석장으로 사용될 만큼 이름 그대로 단단한 암석으로 된 산이었다. 이 산 위아래에도 동네가 있었다. 아래에는 피난민 수용촌이 있었다. 6·25전쟁 때 황해도 등 이북에서 피난 온 사람들이 합판, 천막 등을 주워다가 집을 짓고 살면서 난민촌을 형성했다.
수용소촌 옆에는 1960년대 중반 경 연탄공장이 있었다. 황해도 피난민 출신인 사장은 공장의 이름을 ‘황해연탄’으로 정했다. 근로자들은 대부분 수용촌에 사는 황해도 사람들이었다. 빈손으로 내려와 ‘3·8 따라지’라는 천대 속에서 가난하게 시작했지만 피난민들은 특유의 근면성과 강한 의지로 남한에서 성공적인 삶을 개척해 나갔다.
돌산 위에도 사람들은 위태롭게 집을 짓고 살았다. 밤새 하꼬방집이 들어서 자고나면 골목이 하나씩 생겨나기도 했다. 여름 장마가 끝나면 이 돌산 동네에는 천연풀장이 만들어지곤 했다. 물 고인 웅덩이에서 아이들은 다이빙을 하면서 수영을 했다. 80년대 초 이 돌산 동네는 인천에서 처음으로 재개발되었다.
이 대목에 전두환 전 대통령과 얽힌 이야기가 하나 있다. 취임 후 전 대통령은 산업시설 시찰로 인천제철을 택했다. 시찰단 일행은 먼저 인근의 수용소촌과 송현3동사무소를 들렀다. 이어 돌산 밑 길로 해서 인천제철 쪽을 가다가 산동네를 보고 깜작 놀랐다.
‘아니 인천에 아직 이런 동네가 있다니….’ 이 길은 외국 귀빈들의 산업시찰 루트이기도 했다. 바로 대통령의 철거 지시가 떨어졌고 1982년 돌산 위에는 10평에서 20평짜리의 5층 공영아파트 송현라이프주택단지가 들어섰다.
이 아파트 앞 쪽 수도국산 산자락에는 1967년에 설립한 숭덕중학교가 있었다. 교회가 모태가 된 이 학교는 82년 남동구 만수동으로 이전해 여중과 여고로 분리되어 현재 약 2만명의 졸업생을 배출하고 있다. 학교가 떠난 이 자리에 한 동짜리 누리아파트가 세워졌다. 얼마 전 아파트 바로 앞에 수도국산을 관통하는 터널과 고가도로가 설치되어 주민들의 민원이 끊이질 않고 있다.
글_유동현 굿모닝인천 편집장 사진_김성환 포토저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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