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걷다 - 인천 송림동 현대극장 주변
그 산은 사람들을 품었다. 1900년대 초 일본군이 중구 전동 부근에 주둔하면서 쫓겨 온 사람들이 산등성이에 움막을 지었다. 이어 6·25 한국전쟁이 터지자 황해도 등 이북 사람들이 산비탈에 솥단지를 걸었다. 그들은 곧 고향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생각하고 임시 거처를 마련했지만 반백년(半百年)의 세월을 넘기고 말았다.
60~70년대 접어들면서 공장 일자리를 찾아 충청도와 전라도 사람들이 식솔을 이끌고 산으로 들어왔다. 이들은 우리나라 산업화의 불꽃을 피어낸 장본인들이다.
송림산(松林山)은 그렇게 100년 넘게 사람을 안고 살았다. 이발관, 한약방, 목욕탕, 솜틀집, 국수집… 그 산을 터전 삼아 살던 사람들의 삶의 오랜 공간들이다. 한자리에서 40~50년은 기본, 아직도 그곳에 남아 엄연한 현재의 사진첩을 구성하는 소재들이다. 그 안에는 사람들이 내쉰 숨이 만들어낸 기억과 시간이 훑고 간 삶의 흔적이 생생하게 남아 있다.
송림산은 해발 58m의 아트막한 산이다. 나중에 수도국 배수지가 산정상에 들어서면서 ‘수도국산’으로 불렸다. 송림산을 동서로 나눈다면 한쪽은 송림동, 다른 한쪽은 송현동이다. 서쪽 송현동 기슭은 대부분 재개발되어 ‘솔빛마을’이란 동네가 되었다. 송림동 쪽은 아직 불도저의 삽날을 피해가고 있다. 떠나고 들어오기를 몇 번, 주인은 바뀌었지만 집은 그대로 그곳을 지키고 있다.
애초에 빈 땅에 말뚝 박고 집을 지었기 때문에 동네는 산 모양대로 자연스럽게 터를 잡았다. 그래서 남의 집 마루와 안방을 지나야 ‘내 집’으로 들어 갈 수 있는 기형적인 가옥들이 들어섰고, 사람이 죽어도 관조차 돌릴 수 없을 정도로 비좁은 골목이 생겨났다.
등 굽은 골목들은 마치 쟁기질한 것처럼 길게 산 밑으로 구불구불 내려간다. 산 아래에는 송림로터리, 현대극장, 현대예식장, 동부시장, 노동회관 등 도시 기능의 요소를 두루 갖춘 ‘안 송림동’이 있다. 이곳이 송림동의 안쪽이요 그 밖은 송림동의 바깥이다. 60~70년대 송림동은 실제로 인천 도심의 끝이었으며 개건너 등 교외에서 들어오는 첫 지역이었다. 그 시절 ‘안 송림’은 일종의 다운타운이었다.
송림동의 ‘현대’타운
안 송림은 지대가 낮다. 동네 옆으로 바다와 통하는 갯골이 굽이 흘렀다. 주변은 온통 미나리깡 아니면 배추밭이었다. 낮은 곳을 북돋워 평지를 만들었지만 비만 오면 물이 고였고 사리 때는 바닷물이 범람하기 일쑤였다.
1965년도에 개교한 서흥초교 학생들은 한동안 등교할 때마다 연탄재를 들고 와 운동장에 던지는 게 일이었다. 이 벌판에 곡마단 천막이 쳐지고 원숭이를 앞세운 약장수들이 모이면서 그 땅은 활기를 띠었다.
60년대 초 큰 건물이 하나 들어섰다. 500평 규모의 2층짜리 현대극장이다. 시내도 아닌 변두리에 극장이 들어선 것은 당시로서는 대단한 일이었다. 시내 영화관에서 몇 달 전에 내린 영화 두 편을 동시 상영했다.
주로 한국인이 만든 ‘중국’ 영화와 스토리가 엉성한 애로영화가 올려졌다. 그나마 비가 줄줄 새는 필름은 끊어 먹기 일쑤였다. 그래도 인근 노동자와 서민들의 안식처요, 시네마키드들에겐 꿈의 공간이었다. 영화 대신 땅딸이 이기동, 비실이 배삼룡이 쇼를 하는 날이면 극장 앞길까지 인산인해를 이뤘다.
현대극장은 지역의 랜드마크였다. 이 일대는 송림동이란 명칭보다 현대극장 동네로 통했다. 주변의 상가나 가게들은 ‘현대’라는 상호를 붙이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인근의 대한중공업도 현대그룹에 넘어가면서 ‘현대’제철이 되었다.
현대극장은 지난 1998년 2월에 문을 닫았다. 한동안 비어 있다가 지금은 할인마트가 들어섰다. 극장의 외관은 앞면만 조금 바뀌었을 뿐 지붕과 시멘트 벽 등은 개관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특히 뒷면 벽에 ‘현대극장’이라고 쓴 빛바랜 페인트 글씨는 시간의 흐름을 대변해 준다.
현대시장과 현대상가
현대극장 바로 옆에는 현대예식장이 있었다. 중구 용동에 있는 신신예식장과 쌍벽을 이루던 예식장이었다. 김포, 강화는 물론 서구 지역에 마땅한 결혼식장이 없었기 때문에 시외버스가 닿는 이곳에서 결혼식이 많이 열렸다. 주말이면 하객을 실어 나르는 관광버스로 교통 혼잡을 빚곤 했다. 지금은 그 자리에 제과점과 정형외과가 들어섰다.
그 뒤편으로 아주 독특한 2층짜리 건물이 자리 잡고 있다. 중앙통로에 회랑(폭이 좁고 길이가 긴 통로)이 길게 놓여있고 그것을 중심으로 좁은 골목이 격자형으로 뻗어있다. 2층은 각 집을 통해서만 오를 수 있으며 각 동은 구름다리로 연결돼 있다. 여름 뙤약볕이 내리쬐는 날임에도 불구하고 골목 안으로 들어가면 곳곳에 백열등이 켜져 있다. 그만큼 어둠침침하다.
이 건물의 이름은 ‘현대상가’. 아래층은 가게, 윗층은 살림집인 일종의 주상복합건물이다. 상가가 세워지기 전까지 이 터는 인근에서 키운 배추 등 채소 경매가 이뤄지고 노점상들이 장사를 하던 곳이다.
1970년에 현대상가 건립을 추진하면서 노점상들을 길 건너 시장 깡마당 빈터로 강제 이주시켰다. 1971년 4월 현대식으로 지은 상가를 완공하고 연면적 13평 씩 점포당 300만~350만원에 분양했다. 당시 집 한 채 값에 맞먹는 액수다.
그즈음 쫓겨난 노점상들은 결속을 다지며 상권을 형성해 그해 12월 24일에 동부시장을 설립한다. 이후 원예협동조합공판장, 동구상가, 궁현상가, 송육상가, 중앙상가 등을 ‘현대시장’의 이름으로 아우르며 한때 인천 최대의 시장으로 발전한다.
반대로 현대상가는 몇몇 포목점들이 장사를 했을 뿐 제대로 분양이 되지 않았다. 결국 상권을 형성하지 못하고 1층 가게도 값싼 주택으로 세를 주면서 점차 슬럼화되기 시작했다. 지금은 경쟁에서 밀려난 채 초췌하고 늙수그레한 모습으로 그렇게 40년의 세월을 보내고 있다.
노동회관 이발소
현대극장 못지않게 유명한 건물이 노동회관이었다. 한국노총의 사무실이 있었기 때문에 그 이름을 얻었지만 지역 복지회관의 성격이 강했다.
원래는 50년대 말 혹은 60년대 초에 현대극장 자리에 세우려고 했으나 땅을 파고 보니 개펄이 나와 포기했다. 제삼교회 바로 앞에 터를 잡은 3층 건물에는 목욕탕, 이발소, 미용실, 예식장, 식당 등이 들어섰다.
지역민에게 인기 있던 시설은 바로 목욕탕과 이발소였다. 다른 이발소가 200원 할 때 회관 구내이발소는 30원이었다.
“영등포, 수원 등에서 날 잡아서 온 가족이 머리를 자르러 왔어요. 이발한 후 목욕하고 자장면 한 그릇 먹고도 돈이 남거든. 한창 때는 이발사만 15명을 두고 일했어요.” 2000년 동구청소년수련관이 건립되기 전, 끝까지 노동회관에 남았던 구내이발관 이송열(71) 사장의 설명이다.
한국노총이 떠나면서 회관이 폐쇄하자 그는 바로 옆에 ‘회관이발관’을 열고 지금까지 가위를 놓지 않고 있다. 얼마 전부터는 35세 아들이 같은 자리에서 가위손의 대를 잇고 있다.
현대극장 옆으로 알록달록한 간판을 단 주점들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닭알탕을 주메뉴로 파는 집들이다. 닭알은 죽은 암탉의 뱃속에서 꺼낸, 달걀이 못된 알이다. 50년 전 맞은편 현대시장 닭전에서 쉽게 구할 수 있었던 닭알을 포장마차에서 얼큰하게 찌게로 끓여 내놨다. 현대제철과 인근 철공소에 다니던 노무자들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이후 공락주점을 시작으로 형제, 창석, 왔다, 풍차, 현대주점 등 6곳에서 앞다퉈 닭알탕을 칼칼하게 끓여내면서 닭알탕 거리로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똥공장과 배구장
송림동과 송현동의 접경 지역인 서흥초교 옆으로 가파른 고갯길이 나있다. 사람들이 ‘똥고개’라 부르던 마루턱이다. 송림동 사람들이 수도국산 옆으로 해서 화수동, 만석동으로 다니던 길이다. 이 고개를 따라 배추, 호박, 복숭아 등을 키우는 밭이 널려 있었다. 그 밭에 똥거름을 주었기 때문에 ‘똥고개’라는 이름을 얻었다.
겨울이 되면 얼어붙은 구덩이에 아이들이 빠지는 난감한 일이 종종 생기기도 했다. 여기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지금의 송림동 이마트 자리는 매립하기 전에는 바다였다. 인분을 실은 똥차들이 이곳에다 똥을 버렸다. 바로 옆 염전에서 멱을 감던 아이들은 변소에 빠트린 동전을 줍기 위해 똥차를 따라 다녔다. 실제로 똥차는 동전을 흘리고 다녔다.
송림동이 인분과 맺은 인연은 오래 갔다. 1977년 똥고개 옆 송림6동 대주중공업 뒤편에 송림위생처리장이 세워졌다. 이전에 숭의동과 연희동 등에서 처리했던 인천 전역의 분뇨를 9천평 규모의 이 ‘똥공장’에서 처리했다.
여름날 바람을 타고 날아오는 역한 냄새에 주민들은 두통을 호소하기도 했다. “이 동네에서는 밥 먹는 시간을 배꼽시계에 맞추질 않았어요, 처리장이 가동을 멈췄을 때 바로 숟가락을 들었을 정도였어요. 냄새 대단했지…” 송림동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주윤배(53)씨는 불현듯 기억 속의 냄새를 맡았는지 미간이 살짝 접혔다.
이 처리장은 1996년 9월에 폐쇄됐고 부지는 2014 인천아시아경기대회 배구장으로 재탄생했다. 똥공장 자리에 세워진 배구장의 이야기는 송림동의 극적인 발자취의 하이라이트다.
글_유동현 굿모닝인천 편집장 사진_김성환 포토저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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