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기동 전곡선사박물관장
때는 197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연천군의 한탄강변 전곡리에서 미국 병사 그렉 보웬에 의해 발견된 돌맹이가 구석기 유물로 밝혀지면서 국내는 물론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다. 그리고 1년 후 전곡리 1차 발굴현장, 쪼그리고 앉아 흙더미 속을 뒤지던 젊은 연구원은 자신만 만나면 “구석기도 재미있는데 말이야” 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중얼거리는 스승(김원룡 서울대 교수)의 속내를 알아차렸다.
그것은 삼국시대 마구(馬具·말타기 도구)가 전공이었던 그에게 “전곡리서 뼈를 묻어라”라는 스승의 명령이었다.
동아시아에서는 출토예가 없는 아슐리안 주먹도끼의 출현은 그만큼 스승을 흥분시키기에 충분했고 쉽지 않은 과업인만큼 애제자가 이뤄주기를 바랐다.
배기동은 미 버클리대 유학을 마치고 86년부터 전곡리에서 스승의 뜻을 받들었다. 그곳에서 청춘을 보내는 동안 25년이라는 세월이 후딱 지나갔다. 그리고 마침내 한국 구석기 고고학의 성지(聖地)라고 할 수 있는 전곡리 선사유적지에 박물관이 들어섰다. ‘전곡선사박물관’이다. 물론 박물관의 초대 관장은 전곡리 발굴의 산역사인 배기동(60·국제박물관협의회 한국위원장)이 맡았다.
-박물관 외형이 상당히 특이하다.
건물은 국제현상설계공모를 통해 선정한 프랑스 건축가 니컬러스 데마르지에르의 작품이다. 가운데가 트인 자연 둔덕을 연결해 뱀의 형상으로 만들었다. 원시 생명체를 모티브로 한 것으로 뱀 자체는 자연을 상징한다. 이런 독특한 건축학적 조형미를 감상하기 위해 이미 많은 건축 전문가가 다녀갔을 정도다.
-연천군의 인구가 5만이 채 안된다. 때문에 세계적인 박물관이 건립된 데 대한 지역민들의 기대가 만만치 않다. 부담도 클텐데, 박물관이 지역경제 활성화에 기여할 수 있다고 보는가.
그렇지 않아도 박물관이 지역사회에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 지를 고민하고 있다. 지역사회 역시 그에 따른 경제·사회 전략을 세워야 한다. 박물관이 세워진 곳은 38선이 지나는 곳이다. 사회적 상징이 될 수 있다. 미군병사가 아슐리안 주먹도끼를 발견해서 전곡선사 유적이 세상에 알려졌듯이, 이 곳은 그 자체로 분단과 전쟁, DMZ와 생태 등으로 연계가 가능하다. 사람들을 끌어들일 수 있는 이야기거리는 얼마든지 있다.
-활용방안이 있다는 뜻인가.
박물관 정책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고민을 해온 터라 박물관을 어떻게 활용해야 할 지는 잘 알고 있다. 박물관의 효율성을 극대화시키기 위해서는 사회의 다른 영역과의 연계가 필수적이다. 물론 이곳이 여전히 지리적으로 거리가 멀고, 재반 자료들이 부족한 것이 사실이지만, 유적지내에 박물관이 있다는 장점을 최대한 살리고, 인근에 레저시설이 연속해 있다는 이점을 이용한다면 박물관이 경기 북부의 핵심 포인트로 자리잡을 수 있을 것이다.
-고고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물론 학생들도 서울은 몰라도 전곡리는 안다고 한다. 전곡리 선사유적의 역사적 가치가 그만큼 크다고 봐도 되는가.
전곡에서의 아슐리안 주먹도끼의 발견은 고고학계의 혁명이었다. 대표적인 전기 구석기 유물인 아슐리안형 주먹도끼는 프랑스 생 타슐 유적에서 처음 발견돼 이런 이름을 얻게 된 것인데 150만년 전부터 10만년 전까지 사용됐던 구석기다. 그런데 그때까지만 해도 모비우스의 학설이라고 해서 이런 아슐리안형 석기문화는 유럽과 아프리카에만 있다는 것이 정설이었다. 그런데 동아시아, 그것도 한반도 전곡리에서 아슐리안형 도끼가 나온 것이다. 철통 같던 모비우스의 가설이 와르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첫 발굴부터 지금까지의 과정이 궁금하다.
대학(서울대 고고인류학과)를 졸업하고 삼성 호암미술관에서 잠깐 일을 했다. 1979년 학교로 돌아갔을 무렵 전곡리 유적에 대한 첫 발굴이 시작됐다. 이때 박물관 조교였기 때문에 발굴현장 총괄 소장을 맡게 됐다. 전공이 삼국시대 말 타기 도구여서 구석기는 생소한 분야였다. 처음에는 조교로서 해야할 일이라고 해서 했다. 그런데 발굴하면서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다. 천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1차 발굴은 서울대, 국립박물관, 문화재연구소, 경희대, 건국대, 영남대까지 6개 팀이 공동으로 했다. 6개 팀이 함께 하다보니까 의견차이가 발생했다. 그 이후부터는 서울대에서 도맡았다. 김원룡 교수는 전곡을 서울대의 대표유적으로 만들고 싶어 했다. 때문에 총대를 메라는 압력을 많이 받은 것도 사실이다.
-처음 전곡리 유적의 주위 환경은 상당히 열악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당시 서울에서 전곡 유적지까지 오려면 검문만 적어도 여덟번을 받았다. 최전방이었고 군사지역이었다. 현장에 거주하며 발굴을 하는 동안 대전차 지뢰가 터져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다.
-국내 대표적인 축제로 자리매김한 ‘연천전곡리구석기축제’를 만든 장본인이기도 하다.
축제가 박물관을 열게 된 바탕이 됐다. 진리가 아니면 대중을 끌어 모을 수 없다. 또 대중이 있어야 진리가 빛나는 것이다.
전곡리 유적은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유적으로 역사 교과서 첫 페이지에 나온다. 인근 군부대에 면회온 가족들이 가끔 찾아왔는데 대부분이 “별거 없네”하며 돌아갔다. 그래서 유적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유적에 대해 더 많이 알게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유적전시관을 열게 됐고, 개관 기념으로 선사시대 퍼포먼스를 했다. 지역주민들을 불렀는데 반응이 좋았다. 이것이 선사유적 페스티벌 탄생의 배경이 됐다.
-다른 박물관에 비해 대중성을 불어넣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다.
선사박물관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돌만 전시하는 곳이라고 생각하는데, 중요한 것은 돌을 가지고 어떻게 자연속에서 살았느냐를 설명해 주는 것이 박물관의 역할이다. 박물관을 찾는 사람들은 심각한 관람자와 관광성 관람자 두 가지 부류로 나눌 수 있다. 대상에 맞는 전략을 세워야 한다. 심각한 관람자를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교육 시스템이 필요하다. 유아부터 중학생까지의 계층을 다차원적으로 교육할 수 있는 체험 교육 시스템을 갖춰야 한다.
관광성 관람자들을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주변의 관광요소와 연계 루트를 만들 계획이다.
-전곡리 유적지를 어떻게 개발할 것인가에 대한 마스터플랜이 있을 것 같다.
구석기에서부터 현대까지의 자연의 변천을 피부를 직접 느낄 수 있는 곳으로 만들고 싶다. 박물관은 이 큰 그림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박물관이 생긴 이유는 유적이 있기 때문이다. 유적의 가치가 높아져야 박물관의 가치도 높아질 수 있다. 본질을 놓쳐서는 안된다. 박물관을 중심으로 학문적 연구가 지속적으로 이뤄져야 한다. 앞으로 대한민국은 전곡선사박물관에 대한 자부심을 느끼게 될 것이다.
대담=박정임 문화부장 bakha@ekgib.com
정리=윤철원 기자 ycw@ekgib.com
사진_전형민 기자 hmjeon@ekgib.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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