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치의 흔적 곳곳···왜색풍 건물에선 일본의 욕심 느껴져

유동현 굿모닝 인천 편집장 webmaster@ekgib.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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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路)을 걷다 - 인천시 신흥동 골목

길을 걷는다는 건 그 길과 동행하는 것이다.

 

한때 일본 동네였던 신흥동 골목을 걷다보면 국치(國恥)의 흔적을 곳곳에서 읽을 수 있다. 동네는 사람이 지키는 것이 아니라 집이 지킨다고 했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떠난 지 오래됐지만 남아있는 거리와 가옥에서 느껴지는 일본인의 탐심(貪心)과 욕정에 메스꺼워지는 속은 달랠 수 없었다.

▲쌀창고 리모델링한 디스코장

 

신흥동(新興洞)은 글자 그대로 ‘광복을 맞아 새롭게 발전하고 부흥하자’라는 뜻에서 그 이름을 얻었다. 이전의 동네 이미지를 벗어 버리겠다는 의지도 담겨있다. 지금은 거의 사라졌지만 광복 당시 곳곳에는 적산(敵産)가옥을 비롯한 왜색풍의 건물이 즐비했다.

 

대표적인 건물이 정미소 쌀 창고였다. 옛 도립병원(현 보건환경연구원)과 수인역 인근에는 가등(加藤)정미소, 역무(力武)정미소 등 크고 작은 정미소가 있었다. 1930년대 일제는 경기도 이천, 여주 등 곡창지대의 쌀을 이곳에서 정미한 후 일본으로 반출하기 위해 수인선 협궤열차의 기찻길을 창고 안까지 연결시켰다.

 

현재의 삼익아파트 부근까지 바닷물이 밀려들어왔는데 정미소에서 나온 누런 왕겨가 영종도 앞 바다까지 둥둥 떠다녔다고 한다.

 

붉은 벽돌로 지어진 이 창고들은 고려정미소, 선경창고 등으로 불리다가 70년대 들어서 하나둘씩 디스코텍과 카바레 등으로 ‘용도변경’ 되었다. 이제는 이마저도 거의 다 없어졌다. 대형마트, 가전양판점, 물류창고로 사용하는 서너 동의 창고만이 옛 흔적을 초라하게 읊고 있다.

▲생명줄 긴 적산가옥들

 

창고 뒤편으로 가면 곳곳에 일본식 집들이 모여 있다. 1920년대에 일본인들이 문화주택이라고 부르며 지었던 집들로 해방되면서 적산(敵産)가옥으로 등재되었다.

 

적산가옥은 적의 재산이란 말 그대로, 일본인들이 남겨 놓고 간 집들을 말한다. 살던 집까지 짊어지고 갈 수 없어 남겨진 주인 없는 집이었다. 해방 후 서로 차지하겠다고 쟁탈전을 벌이자 국가에서 민간에게 불하했다.

 

“6·25전쟁 때 이 동네는 답동성당 때문에 살아남았지. 맥아더가 성당 부근 쪽으로는 함포사격을 하지 않았던 거야. 왜놈들이 자손만대로 살 작정을 했는지 비교적 튼튼하게 지어서 오늘날까지 조금씩 손보며 살아왔는데 이젠 그 끝이 보여.”

 

몇 가구로 쪼개져 있던 일본집을 터서 구멍가게를 낸 주인장의 말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지만 신흥동은 개발의 바람이 비껴나가 일본인들이 남긴 잔재들이 비교적 원형대로 보존되고 있다.

 

▲호국영령과 침략자의 망령

 

큰길을 건너 돌층계를 오르면 해광사란 절이 있다. 도심에서 만나기 드문 한적한 사찰이다. 원래 해광사는 1910년에 일본인이 지은 절이었다. 그 흔적이 절 입구 돌기둥에 희미하게 새겨져 있다. 1994년에 왜색풍의 절을 헐고 대웅전을 다시 지었다.

 

문을 열어젖히니 순간 서늘한 기운이 가마솥 같이 펄펄 끓는 바깥 공기를 가른다. 이 건물은 슬픈 이야기를 품고 있다.

 

이곳에는 6·25사변 전몰장병들의 유해 40~50기가 모셔져 있다. 얼마 전까지 지하에 있던 것을 1층으로 옮겼다.

 

“절 뒤 율목공원 자리에 공동묘지가 있었잖아요. 아마 거기에 묻었다가 화장해서 이곳으로 옮겨진 것 같습니다. 유해들은 하나같이 이름은 없고 그냥 김일병, 박이병… 그런식으로 표시해서 찾아가는 사람도 없어요. 한동안 시 차원에서 위령제도 지냈는데 지금은 그것도 없어요. 다 잊혀진 거죠.”

황진스님의 설명이다.

 

6·25전쟁 때 인천을 점령한 인민군은 해광사에 정치보위부를 설치하고 인민군이 퇴각한 후에는 잠시 미군의 소규모 부대가 진을 치기도 했다. 그만큼 해광사는 당시 인천의 육해공을 한눈에 파악하기에 좋은 자리였다.

▲학교 운동장의 러시아함대 포탄

 

신흥초등학교는 1884년 4월 아사히(旭) 소학교로 문을 열었다. 본관 바로 앞 정원 한편에 회색으로 칠해진 포탄 세발이 안내판과 함께 전시돼 있다.

 

1904년 월미도 앞바다에서 벌어진 러일전쟁 당시 수세에 몰리다 자폭한 러시아함대에서 수거한 포탄이다. 일제는 처음에 이 포탄을 인천부청(현 인천시청) 마당에 전시했다가 이 학교로 옮겨 놓았다. 어린 학생들에게 러일전쟁의 승전을 선전하기 위해서다.

 

1953년부터 상설시장이 된 신흥시장 일대는 1903년 ‘화개동(花開洞)’이란 이름을 얻는다. 꽃이 피는 동네. 여자들이 몸을 파는 사창가였다. 공창(公娼)제도를 인정한 일제는 이곳을 유곽(遊廓) 지역으로 만들고 그들의 욕정을 배출했다.

 

신흥동 한쪽에서는 얼마 전부터 다른 종류의 꽃이 활짝 피고 있다. ‘무역’이란 꽃이다. 중국을 오가는 출입구 제2국제여객터미널을 중심으로 50여 개의 소규모 무역업체들이 문을 연 것이다.

1994년 중국과 수교하면서 처음엔 보따리 무역으로 시작된 것이 언제부턴가 소규모 무역업체들이 하나둘씩 들어서기 시작했다. 길가의 허름한 집들이 무역간판을 달고 물류차량이 쉴새없이 드나들고 무역업에 종사하는 중국동포 등이 이 동네에 거주하면서 신흥동 골목의 모습이 새롭게 바뀌고 있다.

 

신흥동의 꽃은 그렇게 피었다 지고 다시 피어나고 있다.

 

글_유동현 굿모닝 인천 편집장 사진_김성환 포토저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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