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참전비 순례(6) 그리스군 참전 기념비
한국전쟁에 참전한 용사들은 한결같이 참전 이유에 대해 “자유와 평화를 위해서”라고 말했다.
실제 그리스 참전 군인의 98%는 자원자였다. 그리스는 6·25 전쟁 직전 자유진영과 공산진영 간 심각한 내전을 겪었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가족마저도 좌우로 갈려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눴다. 사망자만 5만 명에 달했다. 이 때문에 반공정서가 매우 강했던 그리스로서는 지구 반대편에 있는 같은 반도 국가의 처지가 남일 같지 않았으리라.
‘자유와 평화’라는 대의를 위해 인류 문명의 요람이었던 그리스는 알렉산더 대왕 원정이후 가장 많은 군인을 한국에 파병했다.
‘그리스군 참전 기념비’는 UN 참전국 기념비 중 가장 찾아가기 쉬운 기념비 중 하나다.
영동고속도로를 타고 강릉 방면으로 가다보면 여주휴게소가 나오고 참전비는 출구쪽 주유소 부근 언덕위에 세워져 있다.
전쟁이 발발한 지 60년 하고 만 하루를 보낸 지난 6월26일, 주말을 맞은 고속도로 휴게소는 사람들로 넘쳐났다.
휴게소에서 올려다 보는 그리스군 참전 기념비는 신전을 연상케 했다. 천상을 기어오르듯 마흔 다섯 개의 계단을 오르자 기념비는 온전한 모습을 드러냈다. 파르테논 신전에서 옮겨 놓은 것처럼 곧게 뻗은 도리아식 기둥을 양 옆에 두고 직사각형 모양의 흰 돌판이 사이에 서 있다. 돌판 윗부분에는 ‘그리이스군 참전 기념비’란 작은 글씨가 음각돼 있으며, 중앙에는 월계수잎과 투구가 그려진 둥근 동판이 보였다.
그리스 의회는 6월29일 한국전 파병을 결정했으며, 그리스군 선발대는 1950년 12월9일 부산에 도착했다.
미군 사단에 배속돼 전방 지역에서 예비 임무를 수행했으며, 1951년 1월25일 이천 지역에서 중공군과 치른 전투를 시작으로 각처에서 많은 격전을 치렀다. 총인원 5천532명의 군인과 8명의 여성 간호장교들이 참전했으며, 전사 192명, 부상 543명, 포로 3명의 피해를 입었다.
이천 381고지 전투, 연천 313고지 전투, 노리고지 전투, 북정령 전투 등에서 전쟁을 치르며 휴전 직전까지 우리의 국토를 지켜주었다.
이날 참전비에는 모처럼 반가운 손님들이 찾아왔다. 국가보훈처의 초청으로 20여명의 그리스참전용사와 그의 가족들이다. 이들은 그리스정교의 미사 절차에 따라 먼저 간 전우들의 넋을 위로하고 돌아갔다.
<연천 313고지 전투는> ? 연천>
‘연천 313고지 전투’는 유엔연합군이 휴전회담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가능한한 전선을 북쪽을 끌어올리려고 펼친 코만도작전의 일환이었다.
1951년 10월3일부터 5일까지 그리스대대는 수십배가 넘는 중공군 제47군 제139사단과 제141사단에 맞서 싸웠다.
이 전투에서 그리스군은 3일간의 공방전에서 전사 28명과 부상 77명 등 105명의 전사상자가 발생, 그리스군이 한국전쟁에서 겪은 가장 피비린내 나는 전투로 기록돼 있다.
10월3일 새벽, 공격의 선봉에 나선 그리스대대 제1중대가 313고지를 목표로 공격을 개시한다. 중대의 공격은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 보였으나 정오 무렵 증원을 받은 중공군이 오히려 역공을 개시해 오면서 313고지 전방에서는 2시간 여 동안 예측불허의 혼전이 벌어진다.
이날 전투에서 대대는 참전 이래 하루 전투에서 가장 많은 14명이 전사했다.
10월5일 새벽, 유엔 공군기들과 각종 포병들은 313고지 점령을 위해 전례 없는 폭격을 개시한다. 그리스대대는 2차에 걸친 공격 실패에도 불구하고 공격의 끈을 놓지 않는다. 그러나 선봉에 나선 제2중대는 적의 강력한 저항을 예상했으나 의외로 아무런 저항없이 오후 2시경 313고지로 진출한다. 이때 적의 주력은 이미 철수하고 견고하게 구축된 진지안에는 150여 구의 시체와 부상자 12명만이 남아있었다.
그리스 대대의 불굴의 투혼은 각국 지휘관으로부터 격찬을 받았으며, 이 전투의 공훈으로 후일 대한민국과 미국대통령의 부대표창을 수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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