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군 참전비 순례 <3>미국군 참전 기념비
6·25 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를 소집, 참전을 결정한다.
1950년 7월1일 미 육군 제24사단 21연대가 부산에 상륙함으로써 남한은 전세를 역전시킬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16개국으로 구성된 유엔군의 주축이었던 미국은 휴전협정이 조인될 때까지 총 178만명이 참전했고, 3만6천900여명의 전사자가 발생했으며 9만2천여명이 부상을 당해 이들 중 일부는 아직도 전쟁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낯선 나라를 위해 청춘을 바치고 몸과 마음에 상처를 입은 미국 참전용사. 이들의 넋을 기리기 위한 기념비가 임진각에 있다. ‘미국군 참전 기념비’는 망배단이 세워져 명절이면 북쪽 실향민들이 많이 찾는 이곳에 서서 ‘자유는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님(Freedom is not free)’을 웅변하고 있다.
‘미국군 참전 기념비’가 세워져 있는 임진각 평화공원 앞 끊어진 철길 위에는 수십년째 ‘달리고 싶다’는 염원을 간직한 철마가 자리를 지키고 있다.
평화공원 안에는 이름에 걸맞게 평화와 통일을 기원하고, 6·25 전쟁를 기념하기 위한 갖가지 조형물들이 곳곳에 배치돼 있다.
그 중 하나가 ‘미국군 참전 기념비’다. 이 기념비는 6·25 전쟁 당시 참전했던 미국 장병들의 희생과 영령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국방부가 지난 1975년 10월3일 건립한 것. 현재는 파주시시설관리공단에서 관리를 맡고 있으며, 주말이면 수천명의 사람들이 찾는 만큼 주변은 깔끔하게 정돈돼 있었다.
유엔 참전 16개국의 깃발이 걸린 50개의 깃대가 비를 둘러싸고 있으며, 1m 정도 되는 4개의 삼각형 부조는 서로의 꼭지점을 맞댄 채 ‘미국군 참전 기념비’라고 새겨진 비석을 감싸고 있다. 삼각형 안쪽 면에는 미군의 생생한 전투 장면을 그린 그림이 양각으로 새겨져 있다.
참전비 전문에 따르면 4개의 삼각형 부조는 육·해·공군 및 해병대의 참전을 의미하며, 삼각형들의 꼭지점이 연결된 것은 단결을, 내부 가운데 비석은 영령들을 국민 모두가 보호 안치함을 상징한다고 적고 있다. 또 50개의 깃대는 참전 당시 미국의 50개 주를 뜻한다.
미군은 유엔군의 일원으로 참전해 이 땅의 자유와 평화를 수호하기 위해 수없이 많은 희생을 치렀다. 전쟁 기간 중 미국은 제1·제9·제10 군단 등 3개 군단, 제1기병사단을 비롯한 8개 육군사단, 1개 해병사단, 3개 연대 전투단 등을 속속 투입함으로써 미군 전투병력은 최고 30만2천명에 달했고, 총 참전병력은 178만명에 이르렀다.
그 결과 6·25 전쟁 중 거의 대부분이 미군의 지휘 및 작전통제 하에 이뤄진 전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군의 주도로 수행된 주요 전투 및 작전은 140여개에 달하고, 작은 전투까지 합하면 그 숫자는 200여개에 달한다.
미군은 1950년 7월 5일 스미스 특수임무부대의 오산전투를 비롯해 대전전투, 진주·하동전투, 영산전투, 낙동강 방어선 전투, 인천상륙작전, 서울탈환작전, 평양탈환작전, 군우리 전투, 지평리 전투, 불모고지 전투, 포크 찹 고지 전투, 저격능선 전투 등 수없이 많은 전투를 수행했다.
<한미 해병대 행주도강 전첩비>한미>
‘한·미 해병대 행주도강 전투’는 유엔군이 1950년 9월15일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한 뒤 서울을 탈환·수복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전투다. 9월19일 경인가도를 따라 서울로 진격하던 한·미 해병대는 한강 남단에 도착한다. 서울 탈환을 위해 한강을 건너야만 하는 해병대는 한강 도하 작전을 세웠다.
이날 밤 8시14분, 14명의 해병 수색대가 두 개의 고무보트에 나눠 타고 강 건너를 수색했지만, 별다른 적정을 발견하지 못한다. 그러나 김포비행장을 탈환당한 북한군은 서둘러서 1개 대대 병력을 이날 밤 늦게 행주산성 정상 부근에 배치했다.
수색대로부터 보고를 받은 수색대장 호튼 대위는 상부에 ‘이상 없음’을 보고한다. 이 정보에 해병대 5연대장 머레이 중령은 그날로 야간 도하 작전을 감행한다.
미 해병대 5연대 3대대 1중대가 교두보 확보를 위해 개화산 뒤에서 대기하던 수륙양용장갑차에 승차하여 출동한다. 그러나 장갑차가 강을 중간쯤 건너자 행주산성 쪽에서 박격포탄과 기관총이 비 오듯 날아왔다. 당황한 연대본부는 도강 중인 부대를 즉각 퇴각하라고 지시하지만 2대의 장갑차가 좌초되고 정찰대원 1명이 행방불명 되는 피해를 입는다.
성급하게 서두르다가 좌절을 맛 본 미 해병대는 다음날인 20일 새벽 다시 도강 작전을 전개한다. 이 작전에서 미 해병대는 북한군 200여명을 사살하는 성과를 거뒀지만 해병대도 43명이 전사하는 피해를 입었다.
이날의 전공을 기리는 ‘한미 해병대 행주도강 전첩비’가 행주산성 서북쪽 산록에서 한강이 내려다 보이는 곳에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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