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을 달궜던 구대성의 잊지 못할 명장면

2005년 5월17일(이하 한국시간) 그 해 뉴욕 메츠에 입단한 구대성(41)이 메이저리그 진출 후 처음으로 타석에 들어선 날이다. 신시내티 레즈전 8회말 1사에서 중간계투 토드 카피에게 4구만에 루킹 삼진을 당했다.

 

그 장면은 메츠 팬들은 물론이고 현지 중계진 사이에서도 굉장한 화제였다. 구대성이 홈플레이트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섰고 스윙할 의지가 전혀 없다는 자세와 조금은 두려움이 섞인 표정으로 일관했기 때문이다.

 

대체 왜 그랬을까. 호기심이 생긴 현지 취재진에게 구대성이 던진 한 마디는 "좋은 공이 오지 않았다"였다.

 

그런데 그로부터 6일 뒤 구대성의 스윙이 다시 한번 화제가 됐다. 5월23일 뉴욕 셰이스타디움에서 열린 뉴욕 양키스와의 홈경기 때였다. 나란히 뉴욕을 연고지로 하는 메츠와 양키스의 맞대결은 서브웨이 시리즈로 불리는 인터리그 최고의 빅 매치다.

 

7회초 등판해 두 타자를 연거푸 삼진으로 돌려세운 구대성은 7회말 자신의 타격순서 때 예정대로 타석에 들어섰다. 마운드에는 당대 최고의 좌완투수 랜디 존슨이 서있었다. 얼마 전 인상깊은 타격을 선보였기에(?) 그의 타격에 기대를 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구대성은 볼카운트 1-1에서 과감하게 배트를 돌렸고 잘 맞은 타구는 중견수 버니 윌리엄스의 키를 훌쩍 넘기는 2루타가 됐다.

 

곧이어 더욱 놀라운 장면이 나왔다. 1번타자 호세 레이에스의 희생번트 때 구대성은 무난히 3루까지 진루했다. 그런데 직접 포구를 하러나온 포수 호르헤 포사다가 홈플레이트를 비운 것을 보고 그대로 홈으로 쇄도했다. 포사다가 황급히 홈플레이트로 돌아와 송구를 받고 태그를 했으나 주심은 세이프를 선언했다.

 

구대성의 재치있는 플레이로 메츠는 점수차를 3점으로 벌렸고 기세를 몰아 7-1 대승을 거뒀다. 8회초 다시 마운드에 오른 구대성이 선두타자 로빈슨 카노를 삼진으로 돌려세운 뒤 마운드를 내려오자 야구장을 가득 메운 메츠 팬들에게서 기립박수를 받는 멋진 장면이 연출됐다.

 

서브웨이 시리즈에서 믿을 수 없는 타격과 주루 플레이를 펼친 구대성의 활약 장면은 당일 최고의 하일라이트였다. 언론의 관심도 뜨거웠다. '뉴욕 포스트'는 인터넷판 메인페이지에 '크레이지(crazy)'에서 변형된 '쿠-레이지(Koo-RAZY)'라는 표현이 담긴 제목의 기사로 구대성의 활약상을 상세히 전하기도 했다.

 

당시 메츠 단장이었던 짐 듀켓은 "구대성은 우리의 좌타 비밀병기"라는 농담을 하며 즐거워했고 구단 홈페이지도 "구대성이 타율 5할, 장타율 10할로 팀내 선두에 올라있다"며 재밌다는 반응이었다.

 

ESPN은 휴스턴 애스트로스의 프렌차이즈 스타 크레익 비지오를 언급했는데, 1988년부터 메이저리그에서 활약한 비지오가 존슨과의 통산 맞대결에서 단 한번도 안타를 때려내지 못했기 때문이다(결국 안타없이 은퇴했다). 비지오조차 하지 못한 일을 구대성이 해냈다며 재미있는 기록(fun fact)을 전한 것이다.

 

'뉴욕 포스트'는 최근 역대 서브웨이 시리즈의 명장면을 16장의 사진으로 소개했다. 그 중 7번째에는 홈 슬라이딩을 하고나서 심판을 바라보는 구대성의 모습이 담겨있다.

 

22일 공식 은퇴 기자회견에서 당시 상황을 묻는 질문을 받은 구대성은 "홈 쇄도는 순간적으로 나도 모르게 그런 판단을 했다. 머리 속에서 뛰라고 신호가 왔다. 사실은 아웃이었는데 심판은 세이프 판정을 내렸다"며 웃었다.

 

아쉽게도 구대성은 그때의 슬라이딩으로 인해 왼쪽 어깨를 다쳤고 이후 부상자 명단에 오르는 등 이렇다 할 활약없이 시즌을 마감했다. 그가 메이저리그에 몸담은 처음이자 마지막 시즌이었다. 비록 대가는 컸지만 그에게는 영원히 잊지못할 장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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