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포 후 48시간' 국선변호인은 오지 않는다

유명무실한 국선변호인 제도, 고문사건 예방 역할 못해

돈 없는 피고인의 변론권을 보장하기 위해 도입된 국선변호인 전담제도가 겉돌고 있다.

 

사건 배정이 많은데다 경찰 조사가 끝난 뒤에야 피고인들을 접견하도록 돼 있어 서울 양천경찰서 고문 사건 같은 부조리를 막지 못하고 있다.

 

◈ 한 달에 25건씩 사건 수임 '업무 가중'…충분한 변호 불가능

 

지난 2008년 7월부터 국선전담변호인으로 활동하고 있는 변호사 김 (36)씨는 한 달에 25건씩 신규 사건을 수임 받는다.

 

배당된 사건 수가 많기 때문에 재판이 열리는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는 늘상 법정에 선다. 재판이 많은 날은 하루에도 10여건씩 재판에 참여하기도 한다.

 

재판이 없는 금요일에도 구치소에 가서 피고인을 접견하느라 쉴 틈이 없다. 이 때문에 사선변호인처럼 피의자 또는 피고인과 개인적으로 수시로 연락을 주고 받는 일은 상상하기 어렵다.

 

김씨는 "피고인들을 세심하게 챙겨주지 못하기 때문에 피고인들의 심리가 불안할 수도 있다"며 "그렇다해도 일일이 응대를 해줄 수가 없어 필요한 말만 해주고 그 다음 전화부터는 여직원에게 돌린다"고 솔직하게 털어놨다.

 

이어 "당장 눈 앞의 사건을 처리하는데 급급해 재판 전날에서야 (피고인과) 처음 연락을 하는 경우도 있다"고 덧붙였다.

 

피고인 변론을 위해 도입된 국선변호인 전담제도가 실제로는 국선변호인의 업무 부담을 가중시켜 변호사들이 충분한 변호를 펼칠 수 없게 만든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법무부에 따르면 2010년 3월 현재 전국의 국선전담변호사는 모두 135명. 이들은 한 달에 각 25건 정도의 새로운 사건을 배당 받는 것으로 알려졌다.

 

김현 서울변호사회 회장은 "형사사건을 25건씩 수임하게 되면 도저히 바빠서 (일을) 할 수가 없다"며 "피의자 심문사항 등 변론 내용을 5~10장씩 작성하는 사선변호인에 비해 국선변호인은 한 장 이상 쓰는 것이 불가능해 충분한 변호를 할 수 없다"고 말했다.

 

◈ 초기 조사때 접견 불가능…변호인 도움 받을 수 없어

 

하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경찰 수사 단계에서 피의자의 국선변호인 접견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현행 체제에 있다는 분석이다.

 

피의자는 일단 체포되면 구속에 앞서 무조건 변호인을 선임해야 한다. 사선변호사를 고용하지 못한 피의자에 대해서는 국가가 변호인을 대신 선임해주는데, 이들의 접견권은 사실상 차단되고 있다.

 

법정변호인인 국선변호인은 영장실질심사나 기소된 이후부터 피의자에 대한 변론에 참여하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피의자가 기소될 때까지 유치장에서 지내는 최대 열흘의 기간 동안 사선변호인을 선임하지 못한 피의자는 설령 경찰의 가혹행위가 있었다 하더라도 이를 알리기 어려운 실정이다.

 

하지만 대다수의 피의자들은 국선변호인 수임료의 3배에 달하는 사선변호인을 선임하기 어려운 경제적인 형편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국선변호인을 택하고 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의 송상규 변호사는 "체포 이후 48시간 동안은 엄청나게 많은 일들이 벌어질 수 있고, 위축돼 있는 상태에서 초기 조사를 진행하기 때문에 변호사가 가장 필요한 순간"이라며 "하지만 국선변호인은 영장실질심사 단계부터 선임되기 때문에 그 전까지 피의자는 변호사의 도움을 전혀 받을 수 없다"고 말했다.

 

또 다른 국선변호인 A씨는 "피의자들이 수사기관에서부터 변호인의 조력을 받고 싶다고 해도 그 때부터 선정되기 힘든 점이 있다"며 "구속 상태에서 가족이나 도와주는 사람이 전혀 없을 때 변호인이 도와주기 어려운 경우"라고 설명했다.

 

국선변호인 김씨는 "특히 학력이 짧거나 나이 드신 분들의 경우 경찰 초동 수사의 방향을 잘못 잡아 계속 (결과가) 안 좋아지기도 한다"면서 "이럴 때 변호인이 옆에서 조력해줬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일선 변호사들은 피의자들의 인권 보장을 위해 경찰 수사 단계부터 국선변호인을 입회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유재성 변호사는 "현재 국선제도로는 수사단계에서 피의자의 인권을 제대로 보장할 수 없다"면서 "국선변호인도 피의자 수사 과정에 입회할 수 있도록 국선변호인을 확대하는 등 공적 변호체계를 강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선 정부가 시행 중인 각 법률구조사업의 예산을 재분배하고, 로스쿨 출신 변호사를 대거 기용할 것을 해결책으로 제시했다.

 

변호사 A씨는 "양형자료를 모으는 양형조사관 제도처럼 증거 자료를 모아주는 제도가 있었으면 좋겠다"며 "(경찰) 조사를 받는 단계부터 국선변호인이 참여하는 제도가 되면 당사자들에게도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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