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역경 이기고… 인천을 세계에 심은 ‘CEO 시장’

인천-안상수 한나라당 인천시장 예비후보는…

안상수 한나라당 인천시장 예비후보(후보)는 지난 8년 동안 시정을 맡아 인천을 세계적인 도시로 발전시키기 위해 쉬지 않고 달려왔다. 특히 어려운 가정형편을 극복하고 전문 경영인과 국회의원 등을 거쳐 인천시장에 오른 전형적인 자수성가형 인물로, 지난 8년 동안 세계 10대 명품 도시로 만들기 위해 앞장서 왔다.

 

경제전문가로 정치 입문, 희귀병 아내 돌보며 재선 성공

경제자유구역 국내 첫 지정… 동북아 중심도시 기틀 마련

인천아시아경기대회 유치·세계도시축전 개최 알찬 결실

 

◇어린 시절의 기억

안 후보는 충남 태안군 이원면 바닷가 마을에서 부친 안완순씨의 7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어린 시절은 어려운 집안 형편으로 인해 고된 나날의 연속이었다.

 

부친이 작은 어선 한척으로 근근히 생활을 이어갔던 탓에 안 후보는 학창시절 내내 무거운 생활고에 짓눌리게 된다.

 

12살의 어린 나이에 부모의 품을 떠나 시작한 인천에서의 삶도 자신 스스로 헤쳐 나가야만 했다.

 

동구 송림동 산동네에서 서림초등학교를 다니며 신문배달로 생계를 꾸려갔지만 학업에 대한 그의 열정은 남달랐다.

 

그는 고학으로 당시 최고 명문이었던 인천중학교와 경기고에 당당하게 합격한다.

 

◇독학으로 해결해야 하는 학창시절

안 후보는 경복궁 옆 화동에 자리잡은 경기고를 인천에서 통학하며 과외와 입주 가정교사 등 닥치는대로 일했지만 궁핍의 굴레는 집요하게 따라다녔다.

 

친구들의 도움도 거절할 형편이 아니었고, 친구 집에 얹혀사는 생활도 마다할 수 없었다.

 

오랜 기간 동안 경제적인 궁핍에 시달리던 그는 몸과 정신 등이 모두 피폐하게 되고 결국 고교를 졸업하던 무렵 건강이 극도로 악화됐다.

 

이후 서울대에 입학하지만 악화된 건강과 집안의 불행 등은 그를 더욱 지치게 만들었다.

 

게다가 갑작스레 불어온 태풍으로 유일한 생계수단이었던 부친의 어선이 침몰됐고 배에 탄 어부들이 생명을 잃어 집안에는 막대한 빚만 남았다.

 

더욱이 정신적인 지주였던 어머니마저도 오랜 병고 끝에 여의었다.

 

선거때마다 논란이 거듭됐던 그의 병역문제도 이처럼 어려운 가정형편이 주원인이다.

 

어린 동생들을 비롯해 가족의 생계를 꾸리지 못할 정도로 어려운 생활이 지속되면서 그에게 입대는 곧 가족의 생계를 끊는 절박한 문제였기 때문이다.

 

 

 

 

 

 

 

◇금융투자의 귀재

고학으로 생계를 꾸리던 안 후보가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 건 지난 70년대 중반 무렵이다. 당시 장안의 화제였던 ‘제세산업’ 멤버인 그는 이때부터 경영 전문가 토대를 쌓는다.

 

안 후보는 제세산업 이후 일국증권(현 동양증권)에 입사, 기적을 일궈낸다. 부장으로 입사한 그는 당시 증권계에서 기피했던 채권투자분야를 담당, 엄청난 수익을 올리며 1년만에 이사로 승진하는 놀라운 기록을 세운다.

 

이때부터 그에겐 ‘금융투자의 귀재’라는 별명이 붙었다.

 

안 후보는 40대에 동양선물㈜ 시카고법인 대표이사와 ㈜데이콤이사 등을 거치며 동양그룹 종합조정실 사장에 취임, 최연소 사장의 기록도 세우는 등 전문 경영인 기반을 다졌다.

 

◇고난의 연속 결혼생활

이처럼 사회에서 성공적인 길을 걷던 그였지만 집안은 오히려 반대 상황에 직면한다.

 

30대 후반 결혼한 정경임씨(58)가 1년6개여월만인 지난 1984년 뇌졸중의 일종인 ‘모야모야병’으로 쓰러졌다 기적적으로 완쾌된 뒤 대학 강단에 섰지만, 지난 1999년 여름 과로가 겹치면서 또 다시 발병, 식물인간 판정을 받았다.

 

이후 5년여만에 의식을 회복하는 등 또 한번의 기적을 일으키며 의료진마저 놀라게 했지만 안타깝게도 간병인의 손길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상태가 지속되고 있다.

 

희귀병 아내의 손발이 돼 병상에 누워 있는 아내에게 두번의 기적을 불러일으킨 안 후보의 애틋한 사랑 얘기는 아내가 입원했던 병원의 유명한 일화로 남아있다. 슬하에 자녀는 없다.

 

안 후보에게는 바쁜 일정 속에서도 거의 매일 아내를 찾아가는 게 익숙한 일과 중의 하나가 됐다.

 

◇정치 입문

 

안 후보는 지난 1996년 제15대 총선을 통해 정치에 입문한다.

 

선거를 한달여 앞두고 당시 한나라당 전신인 신한국당에서 김석원 쌍용회장 등과 함께 경제전문가(CEO) 영입케이스로 정계에 첫발을 내디뎠다.

 

그는 자신을 키워 준 인천으로 돌아와 계양구 지구당 위원장을 맡으며 지난 1996년 제15대 총선(인천 계양·강화갑)과 지난 1998년 인천시장 선거에 잇따라 출마했지만 연이어 낙선의 고배를 마시게 된다.

 

결국 지난 1999년 열린 계양강화갑 국회의원 재선거에서 당선돼 의정활동을 시작했지만 이듬해 치러진 제16대 총선에서 뜻밖의 낙선으로 다시 좌절을 겪게 된다.

 

그러나 여기서 낙심하지 않고 권토중래 끝에 지난 2002년 6·13 지방선거에서 현역 국회의원 2명을 당내 경선에서 압도적인 표차로 누르고 한나라당 인천시장 후보로 선출돼 제3대 민선 인천시장에 당선된다.

 

이어 지난 2006년 5·31 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 인천시장 후보로 나서 재선에 성공했다.

 

◇세계 10대 명품도시 인천 만들기

안 후보는 상대적으로 낙후됐던 인천의 구조적 틀을 개선하고 시민들의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지난 8년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일에 전념했다.

 

여러 견제와 반대 속에서도 경제자유구역법을 통과시켜 송도·청라·영종지구 등 경제자유구역 3곳을 국내 최초로 지정, 명실상부한 동북아 중심 도시로 우뚝 서는 기틀을 마련했고, 경인고속도로 직선·간선화와 숭의운동장 및 루원시티 등 도심재생사업들도 추진하고 있다.

 

특히 인천대교 개통 등 경제자유구역 1단계 개발사업 완료, ‘2014 인천아시아경기대회’ 유치 성공, 지난해 세계도시축전 성공 개최 등은 그의 대표적인 성과로 꼽힌다.

 

안 후보는 이처럼 인천과 대한민국에 비전을 제시하고 인천의 브랜드 가치 상승 등을 높게 평가받아 지난해말 한국언론인협회로부터 ‘자랑스러운 한국인 대상’ 행정혁신부문을 받았다.

 

이에 앞서 재외동포신문은 지난해 2월 ‘2008 올해의 인물상’, 같은해 4월 우드로윌슨의 ‘2009 올해의 우드로윌슨상’ 등도 수상했다.  /이민우기자 lmw@ekgib.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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