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여성감독 조혜정 "손 꼭 잡아준 남편에 고마워"

GS칼텍스 여자배구단 사령탑 선임…"배려와 감성리더십 기대하라"

지난 4월 15일 한국 프로스포츠 첫 여성 감독이 탄생했다. 76년 몬트리올에서 한국 구기종목 첫 올림픽 (동)메달을 일군 조혜정(57) 한국배구연맹(KOVO) 경기운영위원이 여자 프로배구단 GS칼텍스 감독(계약기간 3년)으로 공식임명된 것. 이 소식이 나가자 주변 사람들의 축하 인사가 끊이지 않았다. KLPGA에서 나란히 프로골퍼로 활약 중인 두딸 윤희(28),윤지(19)도 엄마를 자랑스러워하긴 마찬가지. 조혜정 감독은 특히 "남편에게 고맙다"고 했다.

 

"감독 공식발표가 있던 날 밤, 제가 자는 줄 알고 남편이 제 손을 꼭 잡아줬어요." 그의 남편 조창수 씨는 프로야구 삼성 라이온즈 감독대행, 경북고 감독을 지낸 야구인. "누구보다 감독의 고충과 애환을 잘 아니까 팀을 지휘하는 과정에서 맞닥뜨릴 온갖 어려움을 헤쳐나가야 할 제가 안쓰럽고 걱정됐나봐요."

 

◈"후배들에게 롤모델 될 것"

조혜정 감독은 GS칼텍스 구단으로부터 감독직 제의를 받고 "1주일간 잠을 못잤을 만큼" 첫 여성 사령탑이라는 자리에 대한 부담감이 컸다. "잘못하면 후배들 진로에 누가 되지 않을까 싶었죠." 여자 프로농구도 여성이 감독 물망에 오른 적은 있지만 막판에 무산되곤 했다. 그러나 "극심한 침체에 빠진 한국 여자배구의 변화와 개혁을 이끄는데 앞장서겠다"는 생각으로 그는 고심 끝에 감독직을 수락했다.

 

한국 여자배구의 현주소는 암담하다. 국제무대에서 경쟁력은 갈수록 저하되고, 국내리그 인기는 점점 떨어진다. 조 감독은 그 원인을 내부에서 찾았다. '30년간의 전술 변화'를 도표로 정리한 자료를 꺼내 보이며 "국내 여자배구는 30년 전과 전술,전략에 별 차이가 없다. 배구인의 책임이라"고 그는 꼬집었다.

 

이런 지적은 GS칼텍스에서 조 감독이 펼치고 싶은 배구와도 일맥상통한다. 그는 "재미있는 배구, 신나는 배구를 선보이겠"고 했다. 그러면서 선수들에게 "프로배구는 상품이고, 팬과 관중은 고객이다. 고급상품을 만드는데 남녀 구별이 있을 수 없다. 고객에 만족을 주는 배구를 펼치도록 감독을 믿고 신뢰해달라"고 당부했다.

 

그의 뒤엔 든든한 조력자가 있다. 신만근 수석코치(44)와 장윤희(40) 코치가 코칭스태프로 합류한 것. 조 감독은 2008년 경기운영위원으로 현장에서 여자 프로배구를 유심히 살펴보며 당시 신만근 도로공사 감독을 점찍었다. "벤치운영이 신사적이고, 훈련도 재밌게 시키고, '한'이 서려 있어서 골랐죠." 작지만 피워 넘치는 공격과 탄탄한 수비로 한국 여자배구를 세계 강자 반열에 올려놓은 장윤희 코치와의 조합도 눈길을 끈다. "제2 조혜정이라는 닉네임으로 불려서 친근감이 있었고, 책임감이 강한 모습에 끌렸죠." "빠른 플레이와 조직력 배구를 추구하는 그와는 찰떡궁합이다.

 

스포츠계에선 '여자선수가 여자감독을 선호하지 않는다'는 분위기가 지배적이다. 여자감독은 여자선수의 심리를 꿰뚫고 있어서 차라리 남자감독이 편하다는 생각 때문이다. "선수들이 그런 인식을 깰 수 있도록 배려와 감성 리더십으로 다가갈 겁니다. 감독으로 뿌리 내려서 지도자를 꿈꾸는 후배들에게 롤모델이 되고 싶어요."

 

◈ '두근두근' 76년 몬트리올 올림픽

"꿈인가 생시인가 싶었죠." 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헝가리(3-1 승리)를 누르고 동메달을 확정지은 한국 여자배구 선수들은 라커룸에서 곧 있을 시상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라커룸은 온통 눈물바다였다. 삼삼오오 부둥켜안고 우는 장면이 곳곳에서 연출됐다. 믿겨지지 않는 듯 "우리 메달 딴 거 맞아?" 라고 되뇌이는 선수도 여럿이었다. "당시의 가슴 벅찬 느낌은 지금도 고스란히 남아 있어요. 그때를 생각하면 전율이 일고 소름이 돋아요."

 

"매 경기를 잊을 수 없지만" 4강 진출 분수령이었던 동독전은 조 감독이 꼽는 최고 명승부다. 한국은 5세트에서 13-9, 벼랑 끝에 몰렸지만 기적같은 역전승(5-15, 11-15, 16-14, 15-2, 15-13)을 일궈 4강 티켓을 거머쥐었다. 매일 진땀승부가 이어지자 체력은 급전직하했다. "스파이크 한 번 때리고 나면 진이 빠져서 체격이 좋은 유정혜 선수 등에 기대서 잠시 숨돌리곤 했죠."

 

준결승에서 맞붙은 세계최강 일본 전(3-0 패배)은 진한 아쉬움으로 남는다. "조별 예선에서 모든 걸 쏟아붓고 지쳐서 다리에 내출혈이 일어났죠. 일본 전은 1세트만 뛰고 빠졌어요." 하지만 후회는 없다. 같은 조에 속한 나라(동독, 소련, 쿠바) 모두 비수교국이라서 상대팀 정보가 전무했고, 심판 판정에도 불이익이 많았지만 악조건 속에서 오기와 악바리 근성으로 값진 메달을 일궜기 때문이다. 조 감독은 "기댈 곳은 연습 뿐이었다. 하루 11시간씩 훈련하고 나면 발바닥이 아파서 밤에 잠을 못잤다. 모두 '이대로 무너져선 안된다'는 절박한 심정이었다"고 회상했다.

 

'나는 작은 새'라는 닉네임도 그때 얻었다. 164cm 작은 키로 장대숲을 뚫고서 강타를 꽂아넣고, 부지런히 코트를 휘젓는 그를 보고 현장에 있던 외국 기자들이 'Flying little bird'라는 별명을 지어준 것. 사실 조 감독은 작은 키때문에 서러움을 톡톡히 당했다. 고등학교 진학할 땐 스카우트에서 제외됐고, 실업팀에선 MVP를 수상하고도 대표발탁이 안된 적도 있다. "정형외과 찾아가서 '5cm만 더 크게 해달라'고 의사선생님한테 애원도 해봤죠." 작은 키에 대한 콤플렉스는 혹독한 개인연습으로 극복했다. "점프력을 키우고, 정점에서 스파이크 때리는 훈련을 반복했죠." 몬트리올 모임 멤버 12명 중 4~5명은 지금도 꾸준히 모인다.

 

◈두 딸에게 "존경받는 선수 되렴"

조혜정 감독은 스포츠집안으로 유명하다. 남편 조창수 씨는 야구인이고, 두 딸 윤희,윤지는 프로골퍼로 활약 중이다. 현재 남편은 큰딸 캐디 겸 작은딸 로드매니저 역할을 한다. "최근 한 대회에선 자매가 같은 조에서 플레이했는데, 큰딸이 그래요. 아빠가 자기 공은 안닦아주고, 동생 신경만 쓴다고요." 딸들 덕분에 조 감독은 82타의 수준급 골프실력을 자랑한다. '스포츠DNA'를 타고난 두 딸은 구기종목 선수 출신 부모를 둔 덕분에 250~260야드 장타를 뿜어댄다.

 

77년 종합배구선수권 우승 이후 국내무대에서 은퇴했을 당시 조 감독의 나이는 23세. 그는 "정상에서 그만두고 싶어서 배구공을 놓았지만 빠른 은퇴가 아쉬워" 두 딸에겐 선수수명이 긴 골프를 추천했다. 운동선수는 현역에 있을 때 가장 행복하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조 감독은 2008년 경기운영위원으로 코트에 복귀하기 전까진 아내, 엄마로서의 역할에 충실했다. 80년대 초반 이탈리아 프로팀에서 뛸 당시 익힌 스파게티 요리를 만들며 일상의 행복을 만끽하고, 가족 뒷바라지에 전념했다. 그러나 꿈틀대는 배구에 대한 열정이 그를 다시 코트로 이끌었다. "가족에게 소홀해질까봐 망설였지만 이제 두 딸 모두 자립 가능하다는 믿음이 있어서 복귀하게 됐죠."

 

"두 딸이 챔피언조에서 경쟁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고 운을 뗀 조 감독은 "고통스러운 연습과정도 진정 즐길 줄 아는 선수가 되어라. 또 부러움을 받는 선수보단 존경받는 선수가 되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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