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름값 묻지마" 배짱 주유소

가격표시 의무화에도 표시판 없거나 후미진 곳에 설치한 곳 많아

회사원 서 모(40)씨는 최근 어쩔 수 없이 가격표시판이 없는 주유소에 들어가야 하는 상황에 맞닥뜨렸다.

문제는 이 주유소의 가격이 평소 그가 생각하던 가격보다 터무니없이 비쌌다는 점. 가까스로 1만원 어치만 넣는 것으로 '위험천만한' 상황을 모면했지만 왠지 '사기'를 당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지식경제부의 '석유류 가격 표시 규정'에 따르면 주유소들은 소비자들이 외부에서 가격을 쉽게 식별할 수 있도록 상표표시와 가격표시를 판매소의 입구 등에 하도록 돼 있다.

 

표시 형식과 크기도 정해져 있는 것은 물론이다.

 

그런데 이 같은 규정을 제대로 지키지 않는 주유소들이 적지 않다.

 

서울 강남의 한 SK주유소의 경우 가격표시판이 입구가 아닌 출구 쪽에 세워져 있었다.

 

주유소 관계자는 이유를 묻자 "입구보다는 출구로 차가 더 많이 들어온다"는 황당한 변명을 늘여놓았다.

 

이어 "대부분 도심의 고객들이 가격을 보고 오는 경우는 거의 없다"며 횡설수설했다.

 

인근의 GS칼텍스 주유소는 가격표시판이 아예 가게 안쪽에 비치돼 있었다.

 

주유소 직원은 "가격표시판을 입구에 놓아야 하는 규정은 알고 있지만 고객들이 불만을 이야기한 적도 없고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 거 같다"며 거리낌없어했다.

 

'석유류 가격 표시 규정'이 이렇게 '농락'당하고 있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바로 고무줄 같은 규정의 '융통성'에 있다.

 

실제로 강남의 한 주유소 역시 가격표시판을 주유소 안쪽 후미진 곳에 세워두고 있다.

 

이 주유소측은 "사고 등의 이유로 구청과 협의해서 안쪽에 배치했다"고 떳떳해했다.

 

그래서 강남구청측에 물어봤다.

 

강남구청 지역경제과 직원은 "납득할만한 이유가 있는 경우에는 합의를 거쳐 가격표시판의 위치를 옮길 수 있다"고 친절히 설명했다.

 

지식경제부의 입장 역시 다르지 않았다.

 

지식경제부 담당자는 "원래는 들어가는 입구에서 가장 잘 보여야하지만 사람들의 도보를 방해하거나 공사가 진행되거나 하는 등 도로 상황을 보고 어쩔 수 없다고 판단이 되면 예외적으로 표시판을 옮길 수 있다"고 설명했다.

 

결국 소비자의 선택권을 보장하기 위한 석유류 가격표시 규정은 사실상 사문화 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규정을 위반한 주유소에 대한 처벌 수위에서도 그대로 증명되고 있다.

 

지난해 1월 전국의 지방자치단체가 1만 825개의 주유소의 가격표시 실태를 점검한 결과 437곳이 명백하게 규정을 어겼지만 과태료를 부과 받은 곳은 단 3곳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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