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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의 중용(中庸)
오피니언 임양은칼럼

교육의 중용(中庸)

1762년에 발표된 루소의 교육소설 ‘에밀’은 인위적 교육을 배격, 인간 본성을 존중하는 교육을 강조했다.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그의 계몽주의 자유사상은 프랑스혁명의 사상적 근거가 됐다. 루소의 영향을 받은 페스탈로치는 인간성의 도야와 능력 발달에 직관적 방법을 주창했다. 직관적 방법은 논증적 방법의 반대 개념이다.

루소나 페스탈로치는 위대하다. 이들이 가진 자연주의의 교육적 해석은 오늘날 전인교육으로 집약되고 있다. 그러나 차이점도 있다. 시대적 배경이 다르다. 루소의 계몽사상은 구시대의 묵은 사상을 타파하는 혁신사상이다. 교회의 권위, 귀족의 특권 등에 반기를 든 인간적 사유의 자유를 부르짖었다. 페스탈로치의 직관적 교육법은 시기가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다. 19세기 후반의 제2차 산업혁명이 있기 전이다.

교육계 일각에서 시험을 줄세우기라며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다. 특수 고등학교를 서열화라며 이단시한다. 이들의 생각은 이렇다. 지난 날에 있었던 교회의 권위, 귀족의 특권 등 대신에, 이젠 권력층이나 자본가 등의 신지배층이 등장했으며 이들을 위한 귀족학교가 곧 특목고로 보는 것이다. 따라서 이를 타파하는 것이 혁신적 신계몽사상이라고 믿고 있는 것 같다. 시험을 거부하는 것 역시 교육의 논증적 방법에 대한 반기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착각이다. 시대적 배경의 재해석에 범한 본질적 오류가 크다.

현대 사회는 민주주의 사회다. 인성이 억압 당했던 부르봉 왕조사회가 아니다. 또한 제3차 산업혁명시대다. 경쟁의 시대다.

자녀를 왜 학교에 보내는가, 공부하라고 보내는 것이다. 공부를 얼마나 잘 하고, 잘 가르쳤는 가를 객관적으로 확인하는 평가 방법이 시험이다. 평가가 없으면 발전도 없다.

기회의 균등과 능력의 차이를 혼동해선 안 된다. 계급사관은 버려진 유물이다. 능력도 균등해야 한다는 억지는 인성을 어기는 역불평등이다. 능력의 차이를 기회의 박탈로 우기는 사이비 균등론이 교육의 발전을 가로막고 있다. 고교 평준화만 해도 그렇다. 고교 평준화가 과연 됐다고 보는가, 아니다. 벌써 수십년이 지났는 데도 전혀 안 됐다. 안 될 수밖에 없다. 인간사회의 본질을 외면한 것이기 때문이다.

사회생활은 경쟁이다. 국제사회의 경쟁은 더욱 심하다. 지식산업시대다. 실력이 없으면 낙오된다. 학교 교육을 무경쟁으로 한다고 하여 학생들 장래에 무경쟁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망친다. ‘자주적 생활 능력과 공민으로서의 자질을 구유케 한다’고 규정한 교육법의 교육 목적을 저해한다.

사교육이 성행하는 것은 한국적 기현상이다. 이유가 대학입시에 있는 것만은 아니다. 이의 원인은 다음에 따로 생각해볼 일이다. 어떻든 학교는 공부를 많이 해야 된다. 가령 공부하다가 코피를 흘려도 굳이 안쓰러워 해야만 학생을 위하는 것은 아니다. 이런 것은 있다. 성적순이 개성의 차이로 행복순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대학의 입시지옥은 미국, 프랑스 등 서구에서도 보편화된 일이다. 특히 미국의 월스트리트저널은 코네티컷주의 고2 학생들이 아침 7시30분부터 시작되는 수업에 등교하여 밤 10시가 넘어 귀가한다고 최근호에 보도했다. 시카고에서는 학습 동기를 부여키 위해 성적에 따라 학업 성취도 상금을 주기도 한다. 워싱턴 DC의 한국계 미셸 리 교육감은 지난해 성적이 부진한 23개 공립학교를 폐쇄했다. 그 때마다 시위대가 교육청에 몰려들어 물건을 던지는 등 항의가 거세었으나 서른아홉살의 이 독신녀 교육감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각주구검’(刻舟求劍)이란 말이 있다. 사론서(史論書) 여씨춘추(呂氏春秋)에 있다. 칼을 물속에 떨어뜨려 떨어진 자국을 뱃전에 새겨 배가 가는 줄을 모르고 새긴 뱃전 근처에서만 칼을 찾는다는 것이다. 옛 것에 치우쳐 시세의 추이를 모르는 어리석음을 빗댄 경구다. 이런가 하면 논어(論語)에 ‘온고지신’(溫故知新)이란 말도 있다. 옛 것을 통해 새로운 도리를 알게 된다는 것이다. ‘각주구검’과 ‘온고지신’은 얼핏 생각하면 상반되는 말 같아도 다 새겨들어야 할 잠언이다.

교육의 중용이 요구된다. 극단적인 실력주의나 편향적인 균등주의나 학생들을 위해 이롭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사서(四書)의 하나인 ‘중용’(中庸)은 중간이란 뜻이 아니다. 모든 것을 다 포용한다는 것이 원래의 의미다. 김상곤 경기도 교육감 당선자의 행보가 균등주의에 치우쳐 교육의 미래가 불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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