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지영 "목소리 맑아져 용감하게 모험했다"

성대 수술 후 7집에서 음악적인 변화 시도

(서울=연합뉴스) 백지영(32)의 트레이드 마크인 허스키한 쇳소리가 옅어졌다. 2월 성대 낭종 제거 수술을 받은 후 목소리가 맑아지고 음역대가 넓어졌다. 안개가 한풀 걷힌 느낌이다.

"가성을 못 냈는데 '아~ 아~' 지금은 되잖아요. 고음의 애드리브도 가능해져 기분이 좋아요. 처음에는 지인들이 제 전화 목소리를 못 알아들을 정도였어요."

최근 인터뷰를 한 백지영은 수술 후 7집 '센서빌러티(Sensibility)'를 녹음하며 고등학교 시절 꽤 또랑또랑했던 목소리를 되찾는 기쁨을 새삼 맛봤다. 위산 역류와 성대 결절에 낭종, 성대 근육에 부담을 주는 잘못된 창법까지 10년간의 가수 생활이 목에 많은 상처를 남겼던 것이다.

수술 후 바로 제 목소리를 찾은 건 아니었다. "처음에는 알맹이가 있는 목소리가 안 나왔다"며 "발성 때 힘이 들어가지 않아 소리가 조여지지 않고 퍼졌다. 하지만 음반 프로듀서를 맡은 작곡가 방시혁 씨와 내 목소리를 찾는데 성공했다"고 말했다.

◇안정 대신 모험

댄스 가수로 출발한 백지영은 2000년 불미스러운 일로 공백기를 가진 후 2006년 5집 '사랑 안해'와 지난해 6집 '사랑 하나면 돼'가 크게 히트하며 발라드 가수로 재기했다. 가요계에선 보기 드문 사례다.

백지영은 방시혁 씨와 손잡은 이유부터 설명했다.

"'사랑 안해'처럼 기본 비트에 충실한 한국적인 발라드를 다시 택해 안정적으로 가는 것도 좋죠. 하지만 주식 곡선도 바닥을 치면 그 탄력으로 다시 상승세를 타듯이 변화를 준 7집이 설령 잘못된 결과를 가져와도 8집에서 상승 곡선을 그리는데 발판이 되리라는 자신감이 생겼죠."

솔직히 말하면 숱한 고민을 했고 떨렸다고 한다. 그 불안감을 7집의 '러키 세븐'에 걸었다고.

이때 방시혁 씨는 "이제 모험을 시작하니 다시 태어난다는 생각을 하라"며 "그간 사람들의 손가락질, 조소도 있었지만 모든 걸 등 뒤로 떠나보내라"고 조언했다.

백지영은 성대 수술 후 복용한 약으로 목소리가 너무 깨끗해지자 한달간 약을 끊고 녹음한 덕에 수록곡은 적절한 중량감을 찾았다.

다소 직설적이고 파격적인 제목의 타이틀곡 '총 맞은 것처럼'은 모던 록 풍의 피아노 선율과 슬픈 오케스트라가 어우러져 절제된 슬픔을 표현했다.

영국의 디바 에이미 와인하우스 풍의 펑키한 트랙 '킵 더 페이스(Keep the face)', 댄스곡이지만 '원 투 스리 포'로 똑 떨어지지 않는 엇박인 '이리와', 사우스 힙합 리듬이 가미된 '밤새도록' 등을 녹음하며 비트있는 음악을 부르는 재미도 경험했다.

그러나 '백지영 표' 발라드를 사랑하는 팬들을 위해 '돌아와죠', '여자들만 아는 거짓말' 등의 노래도 수록해 변화와 유지의 접점을 찾았다.

◇밴드부, 그리고 음악

돌이켜보면 그는 어린 시절부터 '노래하는 사람'이 되겠다고 굳은 결심을 했던 건 아니다. 요즘 후배들처럼 수년에 걸쳐 오디션 탈락의 쓴맛을 본 것도 아니다. 음악과의 인연은 16년 전 은광여고 시절부터다.

"고교시절 공부가 너무 하기 싫었어요. 밴드부에 들어가면 대학 합격률이 99% 라더군요. 또 그때 영화 '미션'을 본 후 오보에의 신비한 소리에 반했죠. 밴드부에 가입해 오보에인 줄 알고 '저 악기 불래요'라고 택하고 보니 클라리넷이더군요. 초보자는 소리를 내기 힘든 악기인데 저는 한번에 불었어요."

아버지는 공무원 박봉에 각별히 아끼던 딸을 대학에 보내겠다는 일념으로 당시 300만원 하던 악기를 선뜻 사줬다.

"밴드부는 야간 학생들과 함께 등교해 자율학습도 없었죠. 악기를 잘 불어서 1학년 때 '퍼스트 자리'를 맡았어요. 자만해서 '농땡이'를 쳤죠. 솔직히 고교 수학에서 집합ㆍ명제 이후 사인, 코사인, 루트도 잘 몰라요. 고 3때 대학 가려니 갑자기 악기가 싫어지더군요. 아버지 월급의 반을 제가 쓰니 오빠와 동생이 피해를 보는 것 같기도 했고요."

1년 재수 끝에 백제예술대학 방송연예과에 입학했다.

백지영은 "당시 캠퍼스 커플이던 남자 친구가 남자듀오 멤버로 활동했는데 내 목소리가 좋다고 재능을 발견해줬다"며 "방송연예과에서 뮤지컬 스태프로 참여했다가 교수님이 내 노래를 듣고 연기보다 가수가 낫겠다고 하셨다. 그때부터 노래에 관심을 갖고 연습했다"고 한다.

기회는 우연히 찾아왔다. 백지영의 학교에 강의를 온 사진 작가의 소개로 작곡가를 만나 1집을 낼 수 있었다.

"지금 후배들은 숱하게 오디션을 보고 떨어지죠. 그런 경험이 귀한 것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얼떨떨했죠. 행운이 따랐어요. 원래 음반 타이틀곡이 발라드 '작은 바램'이었는데 라틴풍의 '선택'이 떴죠. 리키 마틴이 그때 한참 인기를 끌었거든요. 춤에 'ㅊ'도 모르던 제가 춤을 춘 거죠. 하하."

◇결혼 보다 일

백지영은 2년 전부터 독립해 살면서 부모님에 대한 마음이 애틋해졌다고 했다. 엄마는 어렸을 때부터 자신과 가장 많이 싸운 사람이다. 엄마와 왜 성격이 안 맞았던 건지 이제서야 깨달았다고 한다.

"제가 싫어하는 제 모습이 엄마를 닮았더라고요. 우유부단하고 사람 한번 좋아하면 간 쓸개 다 빼주고 나중에는 상처받고. 제가 좀 영악했으면 좋겠어요. 남자를 만나도 처음에 사귀기는 힘든데 한번 만나면 완전 빠지는 스타일이거든요. 그래서 제가 한 남자를 3~4년씩 오래 만나나봐요."

5집 인터뷰 때 결혼에 대한 강한 바람을 드러냈던 그는 생각을 한템포 늦춘듯 보였다. 질릴 때까지 일을 한 뒤 결혼해야 한 가정의 충실한 아내와 엄마로 살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집에서 독립한 후 밥 하고 빨래하는 시간이 늘었어요. 절친한 쿨의 유리가 일주일에 한번씩 침대 시트를 빨고 삶는 저를 보고 '왜 그런 수고를 하느냐'고 타박을 주더군요. 점차 여성스러워지고 있어요. 하하. TV에서 센 여자, 아줌마 같은 느낌으로 비춰지긴 싫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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