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리뷰> 극단 예성 ‘피노키오’을 보고

안경모 연극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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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돈에 빠져버린 '한국판 피노키오'

우선 ‘피노키오’라는 원작이 국악뮤지컬로 탄생한다는데 호기심을 가졌다. 당연히 유럽의 시공간을 한국의 과거로 옮길 것이라는 예측과 함께, 관절 목각인형이라는 소재의 이국성을 어떻게 소화했을까 하는 궁금증도 가졌다. 더구나 극단 예성의 홍보물에는 국악음악의 신명과 흥, 한국무용의 신체동작 활용, 숙련된 배우들의 앙상블과 다이나믹한 영상효과 등 많은 자랑들을 펼쳐놓았기에 그 진면모를 만끽하는 것도 또 하나의 의무였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극단 예성의 ‘피노키오’는 많은 효과들에도 불구 정작 작품의 본질을 벗어난 내러티브 요소들과 일관되지 않은 양식의 혼돈으로 그야말로 파편의 혼탕이었다.

‘피노키오’라는 동화의 원작은 거짓된 마음과 진실된 마음-형태적으로는 거짓말과 참말, 혹은 이기심과 이타심으로 드러나는 대립구도를 지니고 있으며 그 결과인 진실된 마음의 수용이 나무인형을 사람으로 변모시킨다는 구조를 지니고 있다. 그런데 극단 예성이 풀어간 ‘피노키오’는 다이나믹한 효과를 취하기 위해 원작의 단순구조에 다양한 내러티브 요소들을 추가하는데 그 과정에서 많은 문제를 야기하고 만다.

우선, 철마왕이라는 존재. 온 마을을 평화가 아닌 전쟁의 도가니로 몰아가며 철생산에 전력투구하여 마을사람들에게 목공일을 하지 못하게 하는 설정이다. 그래서 극단 예성은 원작에서 할아버지가 잃어버린 피노키오를 찾아 바다까지 닿게 된 이야기를 철마왕이 나무인형을 만든 죄로 할아버지를 바다로 끌고 간 것으로 설정했다. 기초 설정 자체는 흥미롭다. 그러나 이런 설정이 일관성을 지니질 못한다. 극 초반부터 전쟁에 대한 위협적인 분위기를 설정했지만 이어지는 장면들에선 그에 따른 어떠한 위협요소도 없으며, 바다로 끌려간 할아버지지만 정작 바다장면에서는 철마왕이라는 존재설정은 사라진다.

또 다른 문제도 있다. 거짓된 마음과 진실된 마음이라는 대립축이 극단 예성의 ‘피노키오’에서는 혼돈에 빠져버린 것이다. 즉, 거짓된 마음과 진실된 마음 또는 남을 배려하지 않는 마음과 남을 배려하는 마음의 주체는 분명 피노키오다. 스스로 거짓을 하고 스스로 남을 배려하지 않다가 스스로 반성하고 뉘우치고 깨우치는 과정에서 일종의 ‘성장기’적인 드라마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극단 예성의 ‘피노키오’는 그 주체에 피노키오가 있지 않다.

‘엄마’를 그리워하는 피노키오의 설정 또한 혼돈의 연속이다. 원작은 홀로 사는 할아버지라는 설정이다. 그러나 극단 예성의 피노키오는 소목장과 그의 아내가 있다. 그런데 장면이 전개하면서 느닷없이 아내는 사라지고, 피노키오는 ‘엄마’라는 존재를 그리워한다. 그리고는 소목장을 구출하고 돌아온 피노키오에게 그의 아내가 피노키오의 ‘엄마’라며 반갑게 맞이한다.

결국 극단 예성의 ‘피노키오’에서 설정된 수많은 내러티브 요소들은 전체 구조 속에서 일관된 설정과 대립 갈등관계 속에 녹여진 것이 아니라 그 때 그 때마다 장면적 효과를 위해 끝없이 임의차용하고 생략해버림으로써 이야기틀까지 흔들어놓아 버린다.

혼돈은 내러티브적 요소에 머무르진 않는다. 가장 크게 드러나는 것이 시각적 양식. 극단이 자랑스레 내세운 영상효과는, 하늘을 나는 피노키오나 고래뱃속을 탈출하는 등 다양하게 시도하고 있지만, 정작 수채만화풍의 영상은 기본무대질감과 의상 등의 시각적 양식과 어울리지 않는다. 더불어, 무대공간과 영상공간이 자연스레 넘나드는 연쇄효과 또한 불연속적이다. 또한 소품의 스타일과 의상의 스타일은 끝없이 시대질감을 넘나드는 혼탕으로 이어진다.

물론 극단 예성의 모든 시도들이 평가절하되어야 하는 건 아니다. 피노키오라는 동화가 한국고전이라고 오해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많은 부분을 한국화했다. 피노키오의 목각스타일을 보다 전통에서 찾고, 인형극장의 설정을 꼭두각시 놀음 등으로 더욱 더 시도하지 못한 아쉬움도 있지만 국악스타일에 어울리는 시공간의 설정은 비교문화적인 의미에서도 긍정적인 시도다. 더구나 국악기로 표현할 수 있는 이야기 소재를 넓혀나간다는 의미 뿐만 아니라 아동교육적 측면에서 국악기와 우리 놀이를 친숙하게 하는 긍정성 또한 있다. 혼돈이 더욱 아쉽게 여겨지는 까닭이 바로 이런 긍정성들 때문이다./안경모 연극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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