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돌 맞은 3·1절 /화성지역 3·1운동 학술회의<경기일보·화성시 주최>
화성시 향남읍 제암리를 비롯, 고주리, 수촌리, 사강리, 화수리 등 3·1만세운동이 펼쳐졌던 발안 일대 모든 지역들의 성역화가 시급한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제암리 3·1만세운동과 일제에 의한 학살사건 등이 정작 고교 한국근·현대사 교과서에는 잘못 기술돼 있어 제대로 된 역사교육을 위해 이를 바로 잡아야 할 것으로 지적됐다.
경기일보와 화성시가 1일 화성시 향남읍 제암리 3·1운동정신교육관에서 주최한 ‘화성지역 3·1운동 학술회의’에서 박환 수원대 사학과 교수는 “화성지역은 최근 급속도로 개발되면서 제암리를 비롯한 독립운동의 사적지들이 파괴될 위기에 놓여 있다”며 “인근 고주리, 수촌리, 사강리, 화수리 등지를 성역화하고 면밀한 현장답사를 통해 더 많은 자료들을 발굴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형목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선임연구원은 “제암리 3·1만세운동은 어느날 갑자기 일어난 게 아니라 한말부터 이땅에 일기 시작된 계몽운동 등 국권회복운동의 연장선상에서 필연적으로 이어졌다”고 지적했다. 조규태 한성대 역사문화학부 교수는 “국내 6종에 이르는 교과서들이 잘못 기술한 부분들이 많고, 제암리 사건과 직접적 관계를 맺고 있는 고주리 사건을 다루지 않은 것은 문제”라며 “올바른 역사교육을 위해 바로 잡아야 한다”고 밝혔다. 이어 한동민 수원시 전문위원, 허동현 경희대 학부대학장, 이길원 경기도 문화관광해설사회 회장 등이 참석, 열띤 토론을 펼쳤다.
▲박환 교수= 대개 3·1운동은 평화적인 만세운동으로 펼쳐졌다. 그러나 화성 송산면은 일제 순사를 처단하면서 가열찬 투쟁 형식을 띤다. 이는 화성이 서울 인근에 위치하며 왕실과 관청의 재산이 많았고, 일제가 토지조사사업이란 명분 아래 수탈 정도가 심했기 때문이다. 여기다 간척사업을 추진하면서 주민들의 노동력 착취로 인해 격렬한 생존권 투쟁으로 이어졌다. 여기에 유교적 바탕과 기독교, 천도교, 천주교 등 종교인들의 노력으로 대중적인 만세운동이 전개되면서 대표적인 민중운동으로 발전됐다.
그러나 화성지역 연구활동은 미진하다. 3·1운동 자료집 하나 발간되지 못했고, 세계적으로 일제 만행의 대표적 사례로 손꼽히는 제암리 학살사건조차 자료집이나 편편한 학술연구서 하나 없는 형편이다.
이같은 상황에서 화성지역 항일운동에 대한 사료의 적극 발굴이 필요하다. 향후 학계와 화성시는 선교사들의 만세운동 및 피해상황 보고, 일본 외무성 등의 일본군 동향 및 화성지역 3·1운동 보도, 일본군사령관 등 고위측의 회고록, 제암리 학살 군인 재판기록, 친일파 조희창 등의 자료수집에 심혈을 기울여 실체를 밝혀야 한다.
▲한동민 전문위원= 수원과 화성 등을 중심으로 펼쳐졌던 3·1만세운동의 내적 연결고리에 대한 파악이 필요하다. 1919년 3월말 이후 4월초까지 진행됐던 3·1만세운동은 수원(3월25일과 28일)~사강(3월26일과 28일)~오산(3월29일)~발안(3월31일)~조암(4월3일과 4일)으로 이어졌다. 특히 이 대목에서 주목할 부분은 최근 학살과 관련, 일본군 아리다(有田俊夫) 중위의 군법회의 자료 등 이 부분에 대한 자료 수집이다. 일본은 자신들의 비행을 숨기려고 하는만큼 이에 대한 우리측 자료들도 계속 발굴해야 한다.
▲김형목 선임연구원= 한말 항일운동은 일제강점기 민족해방운동의 원류를 이해하는 차원에서 연구됐지만, 지역에서 펼쳐진 청년운동이나 노동운동, 농민운동, 여성운동 등에 대한 연구는 부족한 실정이다.
이때문에 지역적 특성을 감안한 국권회복운동에 대한 조사연구가 절실하다. 화성지역은 개신교 전래와 계몽단체 조직 등에 따라 활발한 활동을 전개했다. 대한자강회 남양지회 회원은 군수·개신교 신자, 선교사 등으로 외부 세계와 교류·소통했다. 이들은 수원지역 계몽활동가와 연계, 최성대, 조원시 회원 등은 수원상업회의소나 수원 종로교회를 거점으로 계몽운동을 펼쳤다.
일찍이 화성은 보흥학교와 양성학교 등을 건립해 사립학교설치운동과 국채보상운동 등의 계몽운동을 전개했다. 특히 군대 해산 후 일부 군인들은 사립학교 후원자 혹은 교사로 활동하며 학생들에게 상무정신을 크게 고취시켰다. 이들은 국사훈련에 버금가는 체육활동과 연합운동회를 추진하기도 했다.
여기다 화성지역 국채보상운동은 문중이나 마을단위로 의연금을 모금했고, 용주사 승려 25명과 개신교 여성들의 의성회도 조직적인 모금운동을 펼쳤다. 이 부분에 대한 연구가 더 심도 있게 진행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허동현 학장= 한말 화성지역에서 전개됐던 근대교육운동과 국채보상운동 같은 계몽운동, 그리고 의병전쟁 같은 역사적 배경이 다른 지역에서 펼쳐졌던 3·1운동과 비교할 때 강력한 저항운동으로 표출된 취지를 분석해야 한다. 앞으로 제암리 3·1만세운동은 단순한 역사적인 관점이 아니라 그 당시의 사회·정치·경제적인 시각에서도 고찰돼야 한다. 내년은 3·1만세운동이 일어난지 90년이 되는 해인만큼 보다 종합적인 연구가 진행돼야 한다.
▲조규태 교수= 제암리 학살사건은 독일의 홀로코스트와 비견되는 사건이다. 그런데도 6종의 고등학교 한국근·현대사 교과서들은 제암리 사건에 대해 잘못 기술하거나 이 사건과 밀접한 연관성을 지닌 고주리 사건에 대해선 언급조차 하지 않고 있다.
이에 제암리 사건에 대한 교과서의 오류를 지적하고, 이에 대한 활용방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먼저 화성에 거주하던 일본 정미업자 사사카를 발안주재소 소장 사사키(법문사)로, 육군 79연대 소속 보병을 헌병(법문사)으로, 제암리에서 사망한 사람이 23명인데 교회당 안에서 죽은 사람이 22명, 뜰에서 죽은 사람이 6명(중앙교육진흥연구소)으로, 소총을 기관총(금성출판사)으로 잘못 기재한 것을 지적했다. 고주리 사건은 일제가 제암리 만행을 저지른 후 불과 10분 거리의 고주리로 이동, 이 마을에 위치한 천도교인 김흥렬 등 6명을 학살한 사건이다.
이에 대한 유적 활용 방안에 대해선 제암리 교회와 기념관, 고주리 천도교전교실 등 관련시설을 정비·증축하고, 객관적인 사료를 바탕으로 책자나 다큐멘터리 등을 제작·보급해야 한다. 구체적으로 대량학살에 대한 국제학술대회 유치를 비롯 제암리사건 관련 유적 걷기대회, 제암리 관련 달력제작, 제암리 3·1운동순국기념과 홈페이지 쌍방향 구축 등이다.
▲이길원 회장= 제암리 3·1만세운동과 그 학살사건은 일제의 화성지역 독립운동에 대한 1~2차 진압의 연장선상에서 3차 진압으로 파악해야 한다. 아리타가 병력을 이끌고 발안에 온 것은 13일이고 14일에는 우정면 일원리에 가서 당시 지도적 인사였던 김태경 선생을 살해하고 그의 집 99칸을 불태운 뒤 다음날 제암리를 초토화했고 다시 고주리로 이동해 김흥렬·김성열·김세열 선생과 그분들의 아들들을 살해하는 과정으로 진행됐다. 일제는 전국에서 가장 격렬했던 만세운동이 펼쳐졌던 화성의 독립운동 역량을 궤멸시키기 위한 의도로 이같은 만행을 저질렀다.
/이형복기자 bok@kgib.co.kr
/사진=조남진기자 njcho@kg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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