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파 청산 생전에 못보시고…
1945년1월 항일비밀결사 단체인 ‘대한애국청년당’을 조직, 친일파와 총독부 주요 인사들을 처단할 계획을 세운 뒤 지난 1945년 7월24일 서울 태평로 부민관(현 서울시의회 건물)에서 열린 ‘아세아 민족분격대회’ 현장에서 친일파의 거두 박춘금을 향해 폭탄을 던진 ‘부민관 폭파 의거’의 주역인 고(故) 조문기 선생은 80년 평생을 진정한 독립을 위해 싸워왔다.
그러나 고 조문기 선생은 평생 ‘스스로를 부끄러워 하는 독립유공자’로 살아왔다.
해방 이후 생존한 몇 안되는 독립투사로 지내왔던 고 조문기 선생은 지난 1982년 건국포장을 받은 뒤 ‘광복회 독립정신 홍보위원회‘ 위원으로 전국 순회강연도 다니고 민족문제 연구소 2대 이사장으로 취임, 친일 청산을 위한 ‘친일인명사전’ 편찬에 남은 생을 보냈지만 스스로를 창피하게 생각했다.
생전에 “해방되던 해, 나는 광화문 앞에서 민중들과 조국과 민족을 되찾는 감격을 함께 했다. 하지만 중앙청에서 일장기가 내려지고 성조기가 게양되는 순간, ‘아!’ 이제는 어떻게 독립운동을 해야 하나’하며 온몸에서 소름이 끼쳤다”고 광복의 순간을 회고하기도 했다.
지인들은 “조문기 선생은 좀처럼 중절모를 벗지 않으셨다”며 “일제 때 친일파가 아직도 득세하고 권력을 잡고 있는 사실을 보고 ‘하늘로 간 동지들을 볼 면목이 없다’며 외출할 때 중절모를 벗지 않았다”고 말했다.
{img5,C,000}
고 조문기 선생은 본보와의 인터뷰에서도 “독립운동사는 독립운동가의 역사가 아니라 미래와 후손을 위한 운동”이라며 “과거사 청산은 친일파 청산부터 첫발을 내딛어야 하고 친일파 청산이 안 된 대한민국은 여전히 독립운동을 벌여야 한다”고 단언하기도 했다.
고 조문기 선생 장례은 지난달 11일 아침 7시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서 겨레장으로 치뤄지고 오후 대전 국립현충원 애국지사 3묘역에 안장됐다.
/김동식기자
로그인 후 이용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