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뉴스)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격파하고 영국을 역사상 최전성기로 이끌었던 엘리자베스 1세(1533~1603)는 우리 식으로 치자면 광개토대왕이나 세종대왕 정도에 해당하는 인물이다.
'러브 액츄얼리' '브리짓 존스의 일기' '오만과 편견' 등의 작품으로 잘 알려진 영국의 영화제작사 워킹타이틀이 만든 서사대작 '골든 에이지'(원제 Elizabeth:The Golden Age)는 바로 이 엘리자베스 1세의 이야기를 다룬다.
인도 출신 셰카르 카푸르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골든 에이지'는 이 감독의 엘리자베스 3부작 프로젝트 중 2부에 해당한다.
1998년 선보인 '엘리자베스'의 시대적 배경이 1554년이었던 데 비해 '골든 에이지'는 1585년에서 시작한다.
신교도와 구교도의 대립으로 대륙간 전쟁이 한창이던 16세기 말. 당시 강력한 해군력으로 유럽을 호령하던 가톨릭 국가 스페인은 영국의 왕위 계승 서열 2위인 메리 스튜어트(사만사 모튼)를 이용해 영국을 점령하고자 신교도인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1세(케이트 블란쳇)의 암살 음모를 꾸민다.
국가간 동맹을 목적으로 하는 여왕의 구혼자들이 줄을 잇는 사이 엘리자베스는 자유로운 탐험가 월터 라일리(클라이브 오웬)에게 빠져들지만 나라를 통치하는 여왕으로서의 위치 때문에 애써 마음을 숨긴다.
여자로서의 삶과 여왕으로서의 권위 사이에서 갈등하던 엘리자베스는 메리 스튜어트가 주동이 돼 자신을 암살하려는 음모를 포착해 메리 스튜어트를 반역죄로 사형에 처한다.
구교도인 메리 스튜어트에 대한 사형집행을 빌미로 스페인은 영국에 선전포고를 하고 엘리자베스는 패배에 대한 두려움과 국민의 보호자로서의 책무 사이에서 갈등하다가 결국 스페인의 무적함대에 정면으로 맞서 싸우기로 결심하고 검을 손에 쥔다.
영화는 한 여자로서의 행복과 여왕으로서의 책임감 사이에서 갈등하는 '버진 퀸' 엘리자베스의 심리상태에 초점을 맞춘다.
결국 자신의 최측근인 아름다운 시녀에게 흠모하는 남자를 빼앗기고 자의반 타의반으로 여자로서의 행복을 포기하는 대신 여왕으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선택하게 된 엘리자베스는 공허감 속에서도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인다.
'골든 에이지'에서 가장 시선을 잡아끄는 것은 세밀한 고증을 거쳐 살려낸 엘리자베스 1세 시대의 화려한 복식(服飾)과 호화로운 궁정의 장식물들이다.
웅장하고 위용 있는 기둥과 호화로운 직물로 장식된 천장, 기하학적 무늬의 대리석 바닥은 초기 고딕 양식의 아름다움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여기에 화강암과 석고에 무늬를 조각한 다음 오래된 나무 느낌이 나도록 색깔을 입히고 밀랍을 발라 중세풍의 정교한 목공예품을 만들어 내부를 장식했으며 튜더 왕조의 상징인 장미를 조각한 화려한 석조 장식품을 곳곳에 배치해 여성스럽고 섬세한 느낌을 더했다.
엘리자베스 여왕이 착용한 정교한 자수와 금 레이스, 보석이 달린 벨벳 보디스(코르셋 위에 입는 여성 옷의 하나)와 스커트 앙상블, 다이아몬드와 루비, 진주 등으로 꾸민 화려한 장신구 등은 당시 세계 최강국으로 부상한 영국의 위상을 간접적으로 반영한다.
또 제작진은 엘리자베스의 심리상태를 반영하는 16개의 가발을 특별제작했는데, 어떤 것은 생기 있어 보이고 어떤 것은 비극적으로 보이도록 만들었으며 우아하고 기품 있는 순백의 메이크업과 세련된 머리장식, 형형색색의 보석들은 케이트 블란쳇을 완벽한 엘리자베스 여왕의 모습으로 변모시켰다.
영국의 대표적 명소인 웨스트민스터 대성당과 윈체스터 대성당, 케임브리지 대학, 성 바르톨로메이 교회 등에서 촬영한 고색창연한 미장센도 관객에게 시각적 쾌감을 선사한다.
'골든 에이지'는 이처럼 볼거리가 풍부하지만 영국의 대표적 제작사가 영연방 출신 감독과 배우들을 끌어모아 영국의 최전성기를 이끌었던 여왕 시대의 이야기를 다분히 애국주의적이고 자국중심적 관점에서 그려낸 점은 이 영화를 순수한 의도에서 받아들이기 어렵게 만든다.
엘리자베스 1세와 영국의 정당성을 미화한 이 영화만 보고 이후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떠오른 영국이 전 세계의 식민지에서 저지른 온갖 악행을 떠올리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22일 개봉. 12세 이상 관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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