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소한 야외극, 신선한 충격
쿵쿵쾅쾅 경쾌한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중앙 무대에는 반듯하게, 때로는 삐딱하게 세워놓은 상자들이 어지럽게 미로처럼 설치돼 있다. 무대 왼쪽에서 상자들로 이뤄진 탑이 하나둘씩 분해되더니 그 속에서 한사람, 두사람 탈출하기 시작한 6명. 그들은 탑을 허물며 자신만의 영역에서 새로운 세계와 연결하려는듯 길을 만들어 나가고 새로운 경계에 대한 갈망으로 울부짖는데….
“만약 지금 그대의 삶이 싫어 다른 삶을 살아가게 된다면 그때는 당신이 원하는 방식대로 선택해 보라.”
당신은 어떤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가. 지금의 당신이 살고 있는 인생이 과연 진정한 삶의 가치의 영역에서 어떤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가.
지난 8월17~19일 국내 야외공연 전문극단 코퍼럴 씨어터 몸꼴과 네덜란드의 대표적 거리극단인 루나틱스가 수원화성국제연극제 개막작으로 무대에 올린 거리극 ‘구도(KU-DO)’는 변변한 거리극이 없는 우리의 현실에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 공연이었다.
아무 것도 시작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진실을 위한 고난의 탐험과정을 그린 이 작품은 쿠스 호흐배흐(루나틱스)와 윤종연(몸꼴)이 공동 연출하고 박종태, 김도연, 가와조에 가즈히로, 루트거 바우트르, 에릭 바거르, 로즈텐 오흐븐 등 6명이 출연해 고단하면서도 흥미로운 여정을 컨베이어벨트와 빛과 강한 비트의 음악, 공기와 불과 물 등 특수 효과들을 이용한 신체극으로 관객들에게 내재된 정서적 지각의 경계의 탐험과정을 보여줬다.
고대 그리스 호메로스의 대서사시 ‘오딧세이’에서 영감을 얻은 이 작품은 나와 자아 사이의 새로운 경계를 찾아 떠나는 사람들의 삶을 그린 작품으로 이번 수원화성 국제연극제 개막 공연은 아시아 초연이다. 네덜란드 투어에서 거대하고 독특한 오브제로 색다른 시각예술을 선보였다는 평가를 받은 여세로 이번 수원화성국제연극제 개막작품으로 초청받았다.
그래서인지 아니면 무료 공연이란 혜택(?) 때문인지 수원화성 장안공원 특설무대 간이객석 500여석은 할머니와 할아버지, 어린이, 연인 등으로 모두 채우고도 모자라 공연장 밖에 서서 관람하는 관객들로 넘쳐날 정도였다.
관객들은 처음에는 쉽사리 극에 빠져들지 못했다. 거리극을 접해 본 관객들이 적었던 점도 원인이겠지만 공연에 대한 사전 정보가 없었던 탓에 생소한 내용을 쉽게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으로 짐작된다. 공연을 지켜보면서 관객들이 ‘구도’라는 생소한 작품명에 ‘오딧세이’에서 영감을 얻어 만든 작품이란 것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더 궁금해졌다.
‘구도(KU-DO)’는 서사시 ‘오딧세이’에서와 같이 탈출부터 시작된다. 오딧세이가 섬으로부터의 탈출이었다면 ‘구도’에서의 탈출은 하나의 성, 또는 탑(큐빅으로 해석할 수도 있지만)으로 변했을뿐 극의 전개는 오딧세이를 연상할 수 있는 구성으로 풀어냈다.
탑을 빠져나온 탈출자들은 시종일관 무거운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상자 위에 돌을 쌓고 저마다 옷을 꺼내 입고 새로운 땅을 찾아 떠나는 탐험자들마냥 다리를 놓고 있다. 무대 중앙은 이전의 세계와 전혀 다른 신비의 세계를 의미한다. 저마다 생각하는 자신만의 구도가 있는듯 자신들의 근거를 중앙에 위치한 미지의 세계로 이어가고, 미지의 세계에 들어온 배우들은 온통 혼란스런 미로 속을 헤매며 당황한다. 외부로 이어지는 곳은 보이지 않고 외부는 낭떨어지와 같은 암흑에 묻혀있다. 그들은 단지 비명만 지를뿐 큐브 속에 갇힌 인간들일 뿐이다. 강한 비트의 음악 속에서 탈출자들은 하나둘씩 미로 속으로 사라지고 나타나면서 기쁨과 반가움에 포옹하고 감사함을 느낀다.
여기에서 연출가는 극 비틀기를 시도한다. 동료들은 컨베이어에 올라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슬로모션으로 격투신을 연출하기도 하고 동양적인 쿵후 무술놀이와 희극적 싸움놀이 등 해프닝적 난장놀이로 좌중을 웃음바다로 만들어 버린다.
그러면서도 무슨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시도하기도 한다. 외부의 그 무엇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반복된 몸짓은 서로 함께 공유할 수 없는 아픔과 고통이고 이는 서로 각기 다른 자신들의 언어로 된 고함으로 바뀐다.
무대 중앙에서 물이 담겨져 있는 상자가 열리며 뱃 속에 무엇인가 담은(아마도 새 생명인듯) 여인이 사내 4명에게 양손을 묶인 채 고통스러워 하고 탄생의 아픔 속에 새로운 모체와 유희를 즐긴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자신들의 모태인 판도라의 상자를 열면서 모태가 연기와 함께 사라지자 비탄에 빠지고 결국 모태에서 퍼올려진 물을 퍼내 흩뿌리자 목말라 죽은듯 쓰러져 있던 모든 사람들이 다시 일어나 경쾌한 음악을 따라 미로를 벗어나 또 다른 세상을 향한 항해에 나선다.
극의 앤딩은 새로운 세상에서 잃어버린 모태를 발견하고 적막함이 이어지는 순간 한 사내가 모태를 들고 불타오르는 컨베이어 위에서 무엇인가 응시하면서 끝을 맺는다. 극이 끝나자 관객들은 알듯 모를듯한 반응을 보이며 열연한 배우들에게 박수갈채로 화답했다. 배우들의 진지한 연기에 비해 관객들의 반응은 재미있다거나, 색다른 공연이었다는 반응이 주류를 이뤘다.
‘구도’가 말하고자 하는, 자아와 경계에 대한 철학적인 질문에 대한 답은 이해하지 못했지만 모처럼 좋은 창작 야외공연 작품 하나 만났다는 반가움에 즐거웠다.
배우들의 움직임-발목이 잠기는 적막한 모래벌판 위에서, 상자 속에서, 미로 속에서 배우 6명이 펼친 고단하면서도 흥미로운 여정이 좋았고 군더더기 없이 자신들만의 신체를 이용해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넓은 장안공원 광장에 설치된 단순하면서도 아름다운 무대장치가 인상적이었고, 스펙타클한 이미지는 관객들의 눈을 사로 잡기에 충분했다.
이번 공연이 몸꼴과 네덜란드 루나틱스와의 합작공연이었지만 국내 야외극에 창작개념을 도입하고 야외신체극을 활성화하는 계기를 마련했다는데는 이론이 없을 것같다. 앞으로 새로운 주제와 독창적인 연출로 탄생될 몸꼴의 새로운 야외극을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하며 늦게나마 박수를 보낸다.
/이종현기자 major01@kg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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