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금창고와 염전이 그리운 그때 그시절

시흥시Ⅰ

옛날 서울특별시 금천구 시흥동을 중심으로 한 일원의 지역이었던 시흥은 고구려 장수왕 63년(475)에 잉벌노현,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곡양현, 고려 태조 23년 (940)에 금주로 불러오다가 조선 태종 13년(1413)에 금천현이라 하였고 정조 19년(1795) 에 정조가 부왕인 사도세자의 능행을 위해 안양에 만안교를 가설한 후 고려 성종때(991) 금주의 별호명을 취해 시흥현이라고 불렸다.

시흥의 고구려 시대 지명인 잉벌노의 뜻부터 풀이하면 '늠내'를 한자로 표기한 것으로 '뻗어가는 땅'이란 뜻인데, 고려 때 별호를 조선 정조 때 행정지명으로 택한 '시흥'과 같은 뜻을 지닌 '넓은 땅'을 의미한다. 지명에 걸맞게 시흥은 서울의 영등포구·구로구·금천구·관악구·동작구·서초구 등과 안양시·광명시·안산시·과천시·군포시·의왕시 등을 분가시켰다.

과거 바닷가와 염전이 즐비했던 곳이었던 시흥의 서쪽은 10여년사이 시화공단, 오이도와 월곶 아파트 등이 들어선 도시로 변모했다. 이러한 시흥이 수도권 주민들에게 휴식처로 또다시 각광을 받고 있다. 발전 이전의 시흥의 모습을 2회에 걸쳐 들여다 보자.

/글 시흥=이동희기자

<사진제공> 시흥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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