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굴지의 영화제작사 A사 프로듀서 B씨가 영화감독을 포함한 스태프와 하청업체로부터 리베이트를 받거나 인건비를 과다계상하는 등의 수법으로 영화제작비를 상습적으로 횡령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자 영화계가 술렁이고 있다.
이 같은 문제가 단순히 A사 프로듀서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라 그동안 소문만 무성했던 영화계 전반의 해묵은 관행이 치부를 드러낸 것 아니냐는 영화계 안팎의 우려 때문이다.
일단 A사 측에서는 "불미스러운 일로 해고를 당한 직원이 앙심을 품고 B씨를 음해한 것으로 안다"며 "B씨의 통장에 나타난 금전거래 관계는 빌려준 돈을 돌려받았다거나 은행 신용거래가 어려운 사람을 대신해 돈을 받은 뒤 전해준 것이라서 제작비 과다계상이나 리베이트와는 거리가 멀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B씨가 영화감독이나 영화 촬영감독, 보조출연업체 대표, 영화 무술감독, 카메라대여업체 대표 등으로부터 받은 돈이 30여 차례에 걸쳐 2억여 원에 달해 A사 측의 이 같은 해명을 납득하기 어렵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물론 사건의 진상이야 자체 조사나 검찰 수사 등을 통해 추후 밝혀질 문제겠지만, 사실 영화제작관행에 대한 이 같은 의혹이 제기된 게 어제오늘 일이 아니라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한 영화제작사 관계자는 "최근에는 영화제작비에 대한 회계감사가 많이 강화된 편이지만 불과 10여년 전만 해도 영화제작사에서 프로듀서나 제작실장을 5년만 하면 집 한 채 마련한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었다"면서 "최근에는 영화제작비가 천정부지로 치솟으면서 어떻게 보면 돈이 새나갈 수 있는 여지가 많아졌다고도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단적인 예로 불과 9년 전인 1998년 개봉돼 빅히트를 기록했던 '쉬리'의 경우 한국 영화로는 처음으로 제작비가 30억 원이 넘었다고 화제가 됐으나 요즘 제작비가 30억 원이 넘지 않는 영화는 별로 찾아보기 힘들며 제작비가 100억 원에 달하는 대작들도 심심찮게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영화 한 편당 소요되는 평균 제작비의 경우 10년 전에 비해 400~600% 이상 치솟았다는 것이 영화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제작비 규모가 천정부지로 치솟다보니 이른바 '장난을 칠 수' 있는 여지가 과거에 비해 훨씬 많아졌을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는 것이 영화계 인사들의 지적이다. 특히 지난해의 경우 100편이 넘는 한국 영화가 제작되면서 영화업계로 투자자금이 대거 유입돼 일부 제작자들 사이에 '모럴 헤저드' 현상을 보인 곳도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CJ엔터테인먼트 관계자는 "지난해 영화계에 워낙 비정상적으로 많은 투자금이 유입돼 영화감독들 사이에 '올해 입봉(일본어에서 따온 감독 데뷔를 뜻하는 영화계 속어) 못하면 팔불출'이라는 우스갯소리가 돌기도 했다"면서 "졸속작이 양산됐던 것도 이 같은 현상과 무관치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같은 지적은 지난해 총 108편의 한국영화가 개봉됐으나 정작 완성도가 높은 영화다운 영화는 소수였던 반면 상당수의 영화들이 졸속으로 만들어진 수준 미달의 작품이었다는 점에서 영화계의 공감을 얻고 있다.
영상투자자협의회 박경필 회장은 "지난해의 경우 주식시장에 우회상장한 회사들이 주가 부양을 위해 제작에 많이 참여했고 통신회사들도 콘텐츠 확보 차원에서 투자를 많이 해 영화 제작이 필요 이상으로 많이 이뤄졌다"면서 "영화판으로 돈이 많이 몰리다보니 TV 단막극 수준의 시나리오들이 무분별하게 영화로 제작되는 사례가 많았다"고 꼬집었다.
투자사나 배급사들이 또 한가지 문제점으로 꼽는 것은 투자-제작-배급으로 나누어지는 영화제작 과정에서 충무로의 터줏대감이라 할 수 있는 제작 파트의 입김이 워낙 세다보니 제작사에 대한 견제와 감시 기능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한국영화산업 태동기인 1960~70년대부터 충무로의 헤게모니를 장악해온 것은 영화제작자들이었고 (SK, 대우, 삼성 등 대기업이 들어왔다가 발을 뺀 뒤) CJ나 오리온, 벤처캐피탈 같은 산업자본이 투자ㆍ배급사 형태로 영화산업에 참여하기 시작한 것은 10년에 전에 불과해 여전히 한국 영화산업의 무게중심은 제작사 측에 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영화제작과정에서도 일반 기업의 주주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는 투자사는 제작사에 돈을 대주고 수익이 나면 일정액을 분배받는 정도의 역할만 할 뿐 감독, 배우 캐스팅이나 제작과 관련한 하청업체 선정 등에는 거의 간섭을 할 수 없는 구조라는 게 투자ㆍ배급사의 지적이다.
쇼박스 관계자는 "영화제작과 관련된 분야는 매우 전문적이고 '크리에이티브'에 해당하는 영역이라서 사실 투자사 측에서 간섭하기가 어려운 분야라고 할 수 있다"면서 "제작비 정산을 위한 회계감사는 하지만 프로듀서가 어디에 돈을 얼마나 집행하는지 일일이 간섭하거나 감시하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영화제작사의 한 관계자는 "영화제작비 집행과 관련한 회계는 과거에 비해 많이 투명해졌지만 여전히 일부 부적절한 사례가 있다는 소문도 들리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며 "스스로의 생명을 단축하는 일이기 때문에 제작자 스스로 자정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본다"고 말했다.
영화 전문가들은 제작자의 '모럴 헤저드'와 제작비 유용 등으로 인한 영화의 완성도 저하는 결국 그 피해가 한국영화 전반에 대한 관객의 신뢰도 저하와 외면으로 직결되는 만큼 구시대적인 불투명한 영화제작관행은 개선돼야 할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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