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희도 회장님 시키시는 대로 합니다"

얼굴이 말처럼 길어 '말 부장'이라 불리는 사내가 "이걸 왜 해야 되는지, 무엇 때문에 해야 되는지!"라고 절규하면, 그 옆에 얌전히 앉아 있는 사장은 "그건 바로 회장님의 방침일세~"라는 한마디만 무심히 던진다.

이들의 개그를 보고 웃음을 터뜨리는 사람들은 십중팔구 상명하복 체계에 익숙한 직장인들이다. 이 개그 속 '회장님'은 그들에게 '부장님'이 될 수도 있고 '차장님'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SBS TV '웃찾사'가 11일부터 새롭게 선보인 코너 '회장님의 방침'이 직장 생활의 비애를 풍자하며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

사장 역을 맡은 현병수(27)를 위시해 말 부장 김용석(24), 김 과장 김태환(23), 김 대리 김용현(24) 등 네 명으로 구성된 '회장님의 방침' 팀은 화면에는 등장하지 않는 회장의 존재를 매순간 느끼며 직장생활을 한다.

여기서 회장님은 부하들이 생각하기에는 늘 이상한 것만 시키는 불합리한 존재. 그러나 목구멍이 포도청인 부하들은 회장의 이해할 수 없는 명령와 주문에 괴로워하면서도 매번 어쩔 수 없이 따르게 된다.

"풍자 코미디를 한번 해보자는 생각이었어요. 그러다 직장인을 타깃으로 해보자고 기획했죠. 물론 저희는 직장 생활을 해보지 못했지만 그와 비슷한 군 생활을 경험해봤고 또 각종 간접경험을 통해 소재를 얻고 있습니다."

이 코너에서는 '회사식당 아줌마들이 파업하고 군대에 간 것'도 회장님의 방침. 이런 말도 안되는 방침은 '그렇게'라는 모호한 명령으로 이어진다. 이 회사 상사들은 부하들에게 구체적으로 어떤 지시를 내리는 것이 아니라 항상 "그렇게 하게"라고 말한다. 전라도 사투리 '거시기'를 떠올리게 하는 '그렇게'는 "그렇게 하게"라는 명령에 "그렇게요?"라는 답으로 이어진다.

"'그렇게 하다'는 아이디어는 결과를 미리 관객에게 이야기하고 그 내용을 기대하게 만들자는 생각에서 출발했습니다. 사실 관객이 우리의 의도를 잘 받아들여줄까 걱정도 했어요. 대본을 짜면서도 어렵지 않을까 고민했는데 요즘은 관객이 저희보다 더 앞서가는 것 같아요. 개그의 포인트를 금세 캐치해 웃어주더라구요."

직장생활의 불합리성에 초점을 맞춘 개그인 까닭에 엉뚱한 동문서답이 오가는 것도 특징이다. "자네 출장간다며? 출장갈 때 뭐 타고 가지?"라고 물으면 절대로 "버스 타고 간다"고 답하면 안된다. 이 질문의 정답은 "가르마 타고 간다"다. 마찬가지로 "자네 신발 사이즈가 몇이지?"라고 물었을 때 "250미리"라고 답해도 안된다. 정답은 "견미리"다.

이들에게는 한가지 고민이 있다. 직장인을 겨냥하다보니 폭넓은 층을 포섭하기 힘들다는 것.

"특히 초등학생들이 좋아하는 코너가 아니다보니 즉각적인 반응은 없어요. 대학로 공연장이나 녹화 무대에서는 성인 관객의 반응을 피부로 느끼는데 인터넷을 떠들썩하게 만드는 초등학생들의 도움은 못 받고 있습니다(웃음). 하지만 이 속도대로 꾸준히 반응을 얻을 수는 있지 않을까 싶네요."

예전에는 연예계 중에서 개그계의 군기가 가장 셌다. 선후배간 서열이 분명했고 그에 따른 힘의 논리도 작용했다. '선배님의 방침'이 법처럼 통하던 때가 있었던 것. 그렇다면 현재의 개그계는 어떨까.

"요즘 개그계는 그렇지 않습니다. 방송사 공채 시대가 가고 기획사별로 활동하는 시대이다보니 서로간에 예의만 지키면 부딪힐 일은 없습니다. 예전과 많이 달라졌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저희가 저희 하고 싶은 대로만 개그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개그에도 누군가의 방침이 작용하거든요(웃음)."

/연합뉴스

© 경기일보(www.kyeonggi.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댓글 댓글 운영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