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영화가 고전하고 있다. 지난주 박스오피스(영화진흥위원회·영화관 가입률 93%) 1∼4위를 외국영화 ‘300’ ‘향수’ ‘넘버23’ ‘그 여자 작사 그 남자 작곡’이 차지했다. 한국영화는 ‘수’와 ‘쏜다’가 그 뒤를 이었을 뿐이다.
3월 한국영화 관객 점유율 ‘27%’
‘빼꼼의 머그잔 여행’(9위)과 ‘1번가의 기적’(10위)을 포함해 10위권에 한국영화 4편이 들기는 했지만, 한 주간 동원한 관객 수를 기준으로 계산하면 점유율은 19.2%에 불과하다. 외국영화는 176만3519명, 한국영화는 33만9145명의 관객이 선택했다.
이런 고전은 3월 내내 지속됐다. 2월 한국영화 관객점유율 76.1%는 3월 들어 28일 현재 27.1%로 급락했다. 지난 해 3월 한국영화 관객 점유율은 71.5%나 됐었다.
3월 한국영화 부진은 ‘가벼움’ 탓?
스크린쿼터 축소로 한국영화 의무상영일 수가 146일에서 73일로 반토막 난 것이 현실로 체감된다. 그러나 최근 한국영화가 보여온 ‘가벼움’도 관객이 외면한 이유 중 하나로 보인다.
최근 개봉한 한국영화 ‘바람피기 좋은 날’ ‘마강호텔’ ‘복면달호’ ‘1번가의 기적’ ‘좋지 아니한가’ ‘쏜다’ 등은 묵직한 메시지 대신 가볍게 즐기도록 만들어졌다.
그러나 관객의 선택은 ‘향수’ ‘넘버23’ ‘일루셔니스트’ 등 평소보다 좀 이르게 찾아온 반전 스릴러물이다. 영화계 안팎의 기대에는 못 미쳤지만 한국영화 중 선두를 달린 ‘수’도 같은 맥락의 영화로 볼 수 있다.
‘실미도’ ‘태극기 휘날리며’ ‘왕의 남자’ ‘괴물’ 등 1000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들은 시류에 맞춰 가볍게 기획된 게 아니었다.
4월 대반전 가능할까…‘선수들’ 대기 중
힘겨운 국면에 조심스럽게 4월 한국영화의 재기를 기대케 하는 작품들이 눈길을 끈다.
‘집착으로 변질된 사랑도 용서받을 수 있는가’란 질문을 던지며 인간의 죄의식을 탐색한 ‘뷰티풀 선데이’(29일)를 시작으로, ‘기대하시라 송강호니까’라는 홍보 문구 그대로 송강호의 명품 연기가 빛나는 ‘우아한 세계’(4월5일)가 4월을 연다.
임권택 감독의 100번째 영화라는 수식어만으로도 힘이 실리는 ‘천년학’과 ‘살인의 추억’부터 ‘괴물’까지 깊은 내공을 보여온 박해일의 ‘극락도 살인사건’(12일)도 대기 중이다.
징그러울 정도의 몰입 연기를 보여주는 박신양과 어린 나이에도 큰 에너지를 내뿜는 서신애가 함께 한 ‘눈부신 날에’(19일)가 그 뒤를 잇는다. ‘뷰티풀 선데이’와 ‘극락도 살인사건’은 ‘향수’나 ‘넘버23’에 만만찮은 반전과 스릴을 포진시켰다.
‘텔미썸딩’과 ‘뷰티풀 선데이’의 차이
이 가운데 시사회를 통해 첫선을 보인 ‘뷰티풀 선데이’와 ‘우아한 세계’를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자.
‘뷰티풀 선데이’는 진광교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다. 기회가 오면 ‘인간이란 무엇인가’ ‘영화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싶었다더니 집착과 범죄로 확대 생산되는 인간의 사랑을 범죄 스릴러 형식으로 풀어냈다.
이 영화를 보노라면 1999년 개봉됐던 한석규 심은하 주연,장윤현 감독의 ‘텔미썸딩’이 떠오른다. 당시 관객은 영화를 보는내내 영화의 내러티브와 숨겨진 범인을 찾느라 바삐 머리를 굴렸지만 감독이 숨겨둔 코드와 반전들을 모두 잡아내기란 쉽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영화가 끝난 뒤 머릿속에 담아두었던 사건과 단서들을 재구성하는 작업이 필요했고, 그도 잘 되지 않은 사람은 비디오 테이프를 빌려 다시 한 번 보면서 영화관에서 놓쳤던 것들을 찾아냈다.
‘뷰티풀 선데이’는 관객에 대한 태도로 보자면 그 반대에 서 있다. 영화가 상영되는 동안 관객들은 감독이 숨겨놓은 반전과 사건의 흐름에 대해 생각할 시간을 할애 받는다. 그렇다고 반전을 미리 눈치채기 쉽다는 얘기는 결코 아니다.
‘뷰티풀 선데이’ 머리 쓴 만큼 즐겁다
시사회를 통해 영화를 접한 관객들의 평가는 엇갈리고 있다. 흥미진진하다는 쪽도 있고, 밋밋하다는 의견도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진 감독은 영화관에 들어서는 관객에게 빈 봉투를 하나씩 줄 뿐이다. 담아야 할 맛난 것들은 스크린 위에 있다. 스스로 얼마만큼의 재미를 잡아 봉투에 담았느냐에 따라 만족도는 극과 극이다.
우리가 스스로 잡아내야 하는 재미란 어떤 것일까. ‘뷰티풀 선데이’는 반전이 숨어있다고 미리 공개했다. 때문에 관객들은 영화를 보며 반전이 무엇일지 추리한다. 하나의 가설을 세우고 등장인물들의 관계와 반전을 예상하며 보다 보면, 내 가설이 틀렸음을 알게 된다. 그러면 다른 가설을 세운다. 이번에도 아니다. 마지막에 감독은 예상하기 쉽지 않은 결과를 들이민다.
이런 식으로 영화를 보다 보면 영화는 흥미진진하다. 그러나 감나무 아래 누워 떨어지는 감을 기다리듯 모든 것을 다 쥐여주는 영화를 좋아하거나, 조금은 잔혹하고 특이한 액션을 기대했다간 낭패다. 두뇌 노동이 필요하다.
기자는 여주인공이 한 명인 점에 착안, 강 형사(박용우 분)와 민우(남궁민 분)의 삶이 동시에 보여지지만 시간 차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민우가 죽였다고 생각한 수연(민지혜 분)이 후에 강 형사의 아내가 됐고, 민우의 가해로 식물인간이 된 것일 거라고. 영화가 종반에 치닫도록 가설이 맞아떨어지는 듯했다. 어느 순간 조금씩 삐걱거리더니, 결국은 전혀 생각지 못했던 결론과 만났다. 내 가설이 틀렸을 때의 짜릿함은 즐겁다.
이 시대 아버지들이 꿈꾸는 ‘우아한 세계’
‘우아한 세계’는 대한민국 40,50대 아버지들의 2007년도 자화상이다.
가족을 책임져야 한다는 기존의 가부장적 관념에 휩싸여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칼끝 위의 일상을 버텨내고 있건만, 가정에서의 권위는 커녕 남편으로서도 아버지로서도 대접받지 못한다. 책임과 의무는 있으되 권리와 자유는 박탈당했고, 가족들에게 풍족한 삶을 보장해 주지 못했을 때 돌아오는 건 힐난 뿐이다.
목숨을 담보로 돈을 벌지는 않아도 되고, 가족들에게 고맙다는 말 정도는 듣고 사는 것. 남자들이 꿈꾸는 ‘우아한 세계’는 이 시대 아버지들에겐 사치다.
한재림, 이번엔 ‘생활 누아르’
발칙한 멜로 ‘연애의 목적’으로 데뷔한 한재림 감독은 자신의 광범위한 스펙트럼을 보여주듯 이번에는 ‘생활 누아르’를 들고 나왔다. 우리의 삶이 누아르보다 더 어둡고 참혹하다고 강변한다.
아버지 강인구(송강호 분)의 직업을 조직폭력배로 설정한 것도 적절한 선택이다. 언제 누구에게 밟힐까 두려워하고, 나의 성공을 위해선 상대의 뒷통수를 겨누어야 하는 모습이 조폭이나 회사원이나 같다고 했을 때 ‘목숨 내놓고’ 일한다는 의미를 전달하는데 있어 조폭은 사실감을 높인다.
누아르 ‘달콤한 인생’ 속 폼나는 조폭도 호쾌한 액션도 ‘우아한 세계’엔 없다. 강인구는 집 평수 늘리기와 아들 유학비 마련에 급급한 직장인으로 보인다. 경쟁조직의 현수와 만나는 모습도 언제라도 칼을 겨눌 수 있는 팽팽한 긴장감이 조성되기는 커녕, 오랜 친구와 만나 치기어린 장난을 하는 듯 정겹다. 몇 번의 육탄 액션이 나오지만, 진흙탕 속에서 싸우는 개구리들처럼 보일 뿐이다. 시내 자동차 추격전과 여러 대의 차들이 뒤엉키는 충돌,추돌 교통사고가 그나마 볼거리다.
믿어라, 송강호니까
영화를 보노라면 배우 송강호를 향해 감탄이 절로 나온다.
흐트러짐 없는 조직 중간 보스로서의 카리스마와 먹고 살기 위해 분전하는 가장의 모습, ‘사랑과 존경’이라는 반대급부 없이도 자식을 위해서는 물불 가리지 않는 아버지의 모습. 동시에 내재하기 어렵거나, 섣불리 동시에 표현했을 때 어색해 보일 수 있는 캐릭터들이 송강호 위에서는 하나로 융합된다. 이러 이러한 캐릭터를 동시에 지닌 인물을 송강호식으로 표현한 게 아니라, 송강호가 그냥 강인구다.
그의 연기를 보노라면 눈이 바쁘다. 눈동자의 움직임, 눈꺼풀과 입술의 떨림까지 디테일이 일품이다. 작은 것을 좇느라 큰 것을 놓치지 않는다. 연기파 배우들 중에는 개인의 연기는 돋보이는 전체 작품을 책임지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송강호는 본인의 연기만 부각시키는 게 아니라, 자신의 연기력으로 영화 전체의 감동과 완성도를 끌어올린다.
송강호는 ‘넘버3’에서 라면을 먹으며 웃겼다. 주린 배를 라면으로 채우며 달린 마라토너 임춘애를 현정화라고 우기는 ‘불한당’이었다. 그는 ‘우아한 세계’에서 라면 하나로 관객을 울린다. 가족들이 해외에서 자신의 목숨값으로 행복하게 지내는 모습을 VTR로 보며 라면을 먹는 모습은 눈물겹다.
가족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TV만 크고, 집만 덩그러니 넓다 뿐이지 그의 마음 속은 서럽고 비참하다. 울화가 치밀어 라면 그릇을 던져보지만, 제 손으로 치워야하는 게 주어진 현실이다. 쉽게 잊혀지지 않을 인상적인 엔딩이다.
영화계에 출사표를 던진 진광교 감독과 두 번째 연출작으로 2년 만에 돌아온 한재림 감독의 젊은 피와 한국영화계를 짊어지고 있는 40대 송강호의 힘이 4월 극장가를 환하게 밝힐 지 주목된다. 사진=위로부터 루씨필름,시네라인㈜인네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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