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일본 아카데미 영화상의 우수작품상,우수감독상 등 11개 부문을 석권한 ‘훌라걸스’가 20일 국내에서 첫 선을 보였다.
서울 신촌 메가박스 시사회 이후 열린 기자회견은 1시간 이상 진지하게 진행됐다. 일반적으로 영화만 상영되는 외국영화 시사회와 달리 감독이 직접 나와 기자들의 질문에 답했다. 재일교포 2세로 일본 영화계에서 활약 중인 이상일 감독이 내한한 터라 열기가 뜨거웠다.
새로운 시대를 만드는 소녀들의 ‘훌라댄스’
먼저 영화 이야기. 제목에 ‘girls’가 공통적으로 들어있고, 춤을 소재로 했고, 각각 일본과 미국의 각종 영화상을 휩쓴 작품이어선지 영화를 보기 전 22일 개봉을 앞두고 있는 ‘드림걸즈’가 연상됐다. ‘드림걸즈’는 파티에 온 듯 관객의 엉덩이를 들썩거리게 하는 신나는 영화다. 볼거리도 풍성하고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도 명료하게 잘 표현됐다. ‘훌라걸스’도 그러려니 했다. 헐리우드 대작만큼은 아니어도 눈을 즐겁게 하는 볼거리와 보통의 일본영화가 주는 감동이 적당하게 조합돼 있을 거라는 기대를 가지고 영화를 봤다.
역시 예단은 금물. ‘드림걸즈’가 화려한 테크닉으로 감정을 들뜨게 하는 열정의 영화라면, ‘훌라걸스’는 사람의 마음을 울리는 감동의 영화다. 눈과 입은 웃고 있는데 어느새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에 머쓱해진다. ‘울다가 웃다가’ 하는 영화가 아니라 ‘웃으면서 우는’ 영화다.
‘훌라걸스’는 1965년 폐광 위기에 놓인 탄광촌을 배경으로 살아남을 길을 찾기 위해 ‘추운 탄광지대’에 ‘따뜻한 하와이’를 세우려는 사람들, 그 중에서도 탄광촌에 훌라댄스를 꽃피우려는 소녀들의 이야기를 따라간다. 영화는 실제로 폐광촌에 훌라댄스를 심은 카레이나니 하야카와 선생의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 끝이 보이는 순간에 희망을 만드는 사람들, 자신만이 아닌 가족과 마을의 미래를 걱정하고 따가운 눈총을 감수하며 훌라댄스를 배우는 어린 소녀들의 절박하고도 진지한 모습은 그 자체로 감동이다.
“영화를 만드는 것 자체가 내 정체성”
이번엔 감독 이야기. 이 감독은 영화의 스탭 스크롤에 본명 ‘이상일’을 그대로 올리는 영화인이다. 비판적 시각을 견지해온 그간의 작품들과 달리 대중적 취향의 ‘훌라걸스’를 선보인 까닭에 그의 ‘정체성’에 관한 질문이 많이 나왔다.
니힐리즘(허무주의)을 버린 것인지, 대중적 취향으로 선회한 것인지, 영화를 찍을 때 한국인이란 정체성이 어느 정도 각인되는지 등에 대한 질문이 잇따랐다. 이 감독은 분명한 입장을 견지하며 명료한 답변을 내놨다.
“영화를 만드는 것 자체가 나의 정체성인데 영화의 내용을 놓고 민족적 정체성을 물으니 느낌이 오지 않는다.”
“매번 똑같은 영화를 찍는 것은 재미없다. 이번엔 많은 사람들이 봤으면 하는 영화를 만들었다.”
“지금 본 이 영화와 니힐리즘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은가.”
모르면 모른다고 답할 수 있는 감독
정중하지만 분명하게 자기 생각을 전달하는 이 감독의 화법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대답하는 솔직한 태도다. ‘아는 척’ 얼버무리지 않고, 자신이 아는 범위에서 진지하게 답했다. 한국에서 일본영화가 조용하게 흥행하는 까닭, 일본에서 한국영화가 크게 흥행하지 못하는 이유 등의 질문이 던져졌다.
“잘 모르겠다. 다만 급격히 달아올랐던 한류가 식을 때도 있지 않겠나. 일본 관객이 TV 드라마에 싫증을 내면서 예전에 비해 영화를 선호하고, 외국영화에 비해 자국영화를 많이 보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 자체가 관객시장의 성장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한국에서 일본영화가 호응을 얻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잘 모르기 때문에, 한발 더 나아가 흥행하는 이유에 대해 답을 드릴 수가 없다.”
남자가 그리는 여자 이야기 ‘뜻밖의 재미’
이상일 감독은 1969년을 배경으로 한 ‘69 식스티 나인’으로 한국 관객에게 이름을 알렸다. ‘훌라걸스’는 1965년이 배경. 60년대에 대한 특별한 관심이 있는 걸까.
“60년대에 대한 특별한 시대적 관심은 없다. 나는 캐릭터와 스토리에 우선 끌린다. 다만 60년대가 배경인만큼 등장인물의 사고 방식과 선택, 사람들의 생활 양식이 그 시대에 걸맞게 전개되기는 했을 것 같다.”
‘69 식스티 나인’은 졸업을 앞둔 고3 남학생들의 엉뚱하고도 유쾌한 일탈을 그린 이야기, ‘훌라걸스’는 가부장적 사회에서 벗어나 스스로 미래를 준비하는 여자들의 이야기다. 감독이기 이전에 남자인 그가 여자들의 이야기를 그리는 과정에서 겪은 즐거움 혹은 어려움이 궁금했다.
“남자로서 여자 이야기를 다루니 ‘남자라면 이렇게 하겠지’하는 발상이 통하지 않는 부분이 있어 어려웠다. 하지만 여성을 그리고 있기 때문에, 남자 이야기라면 평소에 하지 않을 것, 발상하지 않을 것을 시켜보는 재미도 있었다. 예를 들어 여선생님이 남탕을 향해 돌진하는 장면이 그렇다. 남자가 여탕에 돌진하는 건 아주 이상한 장면이 될 것이다. 그러나 여자가 남탕에 돌진하는 것은 재미있고 의미있는 장면이 됐다. 이렇듯 여자 이야기를 그리며, 결과의 전환에서 오는 재미를 느낄 수 있었고 보는 방식이 달라지기도 했다. 예상 외로 재미있는 작업이었다.”
야오이 유우의 매력이 빛나는 영화
카메라는 고된 탄광 노역이 아닌 즐겁게 일을 하며 돈 벌 수 있는 새로운 시대에 들뜨고, 자신만이 아니라 가족과 마을에 대한 책임을 짊어지려 하고, 그를 위해 쉼없이 달려가는 기미코(야오이 유우 분)의 꿈과 열정을 좇는다. 그녀의 곁에는 춤을 가르치는 여선생 마도카(마츠유키 야스코 분)와 어머니(후지 스미코 분)가 있다.
영화 속에서 기미코의 오빠가 말한다. “엄마나 너나, 그 선생이나...여자들은 강해.”
이상일 감독은 이를 두고 정말 실감나는 대사였다고 말했다. ‘훌라걸스’는 절망의 순간에 희망을 긷는 강한 여자들의 이야기다.
이상일 감독이 ‘현시대 일본에서 가장 좋은 여배우인데 그 아닌 누구를 캐스팅 하겠는가’라는 극찬을 아끼지 않은 아오이 유우. 대본을 이해하고, 캐릭터를 이해하고, 대사를 이해할 줄 아는 ‘기본’을 갖춘 여배우가 보여주는 연기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 그녀의 반짝이는 눈빛과 해맑은 미소, 아름다운 훌라댄스가 인상적인 ‘훌라댄스’는 다음달 1일 국내 개봉한다. 사진=씨네콰논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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