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 속에 지속하는 추억의 두꺼운 층을 터치하는 춤
그리움은 어떻게 태어나고 어떤 영향을 행사하는가. 사적 기억이 몸에서 마른버짐처럼 꽃피었다 무대에 등장하는 건 어떻게 봐야 할까. 한국 무용계의 새로운 춤맥을 찾아가는 안무가 정영두의 신작 ‘휘어진 시간’을 보면서 이러한 질문들을 던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움은 사적 기억이며 애틋한 감정이다.
성년만이 느끼는 시간적 성찰인 동시에 고유한 감각이다. 그리움을 춤으로 표현한다는 건 살아온 시간들이 축적해온 층을 다시 열고 그 기억의 계열들을 다시 한번 더듬는다는 의미를 갖는다. 기억의 계열들을 고고학적으로 열어 보일 수도 있고 엇갈리는 기억들 속에서 회한과 우수를 느낄 수도 있다. ‘휘어진 시간’은 먼저 무대 한가운데 호선(弧線)을 따라 돌을 배치, 기억을 되살리는 제의를 펼쳐놓는 것 같다. 그것은 사적 기억인 동시에 숭고한 느낌을 자아내기도 한다. 한점의 조명들이 들고날 때마다 무용수 각각이 빛 속에 등장하고, 그들은 각자 그리움의 언어처럼 독특한 몸짓들을 한가지씩 소개한다. 그 그리움의 언어로서 몸짓들은 코드화돼 있으며, 다시 다른 코드들과 만나고 헤어지면서 구체적인 그리움의 장면들이 눈 앞에 나타난다. 가령, 입 속에 손을 넣는 동작, 자신의 몸의 선을 쓰다듬는 동작 같은 단위들이 만나 새로운 장면들로 열어 젖힌다.
안무가 정영두가 배치한 공간은 ‘돌의 정원’이고 마치 그리움을 호출하기 위한 일종의 스톤헨지 같은 영역이다. 앞서 기억을 되살리는 제의를 펼쳐놓는다고 했던 건 이같은 공간적 권능이 물씬 풍기기 때문이었다. 거기에 Renata Suicide가 담당한 라이브 음악이 담백하고 서정적인 톤으로 받쳐준다. 튀지 않으면서도 기억이 일깨워지는 미니멀한 사운드는 안성맞춤이었다.
시공간의 디자인이 끝나자, 정영두는 그리움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는 것이며 그 사이에서 발생하는 차이를 두드러지게 포착한다. 물론 그리움이 발생하는 사적 기억의 거처는 과거에 있었고, 그 과거로부터 전송되는 신호는 다시 한번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울림을 갖는다. 기억은 지속하는 것이며 정신적 흔적을 남기기 때문이다. 곽고은·윤푸름을 비롯한 무용수들은 기억과 그리움, 과거와 현재, 집착과 쿨함 사이를 오가면서 그 신호 체계가 우리에게 있어 무엇인가를 가만히 선보인다. 과거에 흘렀던 물자욱이 강바닥에 우묵한 흔적으로 남듯 상처를 통과하지 못한 그리움은 그리움이 아니라고 표현한다. 실제로 무용수 정동은을 끊임없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고갯마루로 넘기는 연출은 기억을 사람의 몸 전체로 매개한 것이며, 짝지은 커플들이 끊임없이 그 호선의 길을 걸어가며 만남과 사랑과 이별과 분리를 표현하는 건 상처의 현상학을 통해 그리움에 접근하는 것이다.
상처가 없는 기억은 그리움을 낳지 못한다는 것. 그리움에 다가가는 길목에는 상처가 환하며 그 상처의 환기를 통해서만 그리움의 대상이었던 타인의 얼굴을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타인의 얼굴이 된 사랑은 과거형인 듯하면서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정영두의 안무는 몸을 터치하는 디테일한 동작들이 그리움의 습윤을 어떻게 드러내는지를 보여주며 ‘지금 여기’까지 전해지는 높고 쓸쓸하며 환한 상처를 여과없는 정서로 그려낸다. 가고 가고 한번 더 가는 과정 속에서 연인들은 그리움의 정서가 어떻게 태어나는지를 연기한다.
그 상처의 현상학은 무거움을 발견하는 방법일지도 모른다. 정영두가 이미 쓰러진 한 무용수의 몸 주변에 돌을 하나씩 갖다두는 연출을 하는 건 그 돌무덤이 곧 충분히 무거워진 기억이란 은유일 뜻이다. 그리고 그 돌 하나하나가 움직여질 때마다 사람들이 그 돌의 동선대로 움직이는 건 사람조차 무거워졌다는 뜻일 것이다. 그리움의 진정성은 가볍고 긴 사랑에 있는 게 아니라 못 견딜 정도의 열병과 한기 속에서만 찾아온다는 역설이 바탕에 깔려있는지도 모른다. 확실한 건 그 돌무덤의 구축과 해체를 통해 그리움이 엄청난 무게감을 갖는다는 것이며, 사적 기억보다 더욱 무거워진다는 것이다. 기억은 단지 지속할 뿐이며, 그리움은 지금 막 새로 생성됐기 때문이다.
시간 속을 떠도는 기억은 과거의 매듭을 풀어버리고 새로운 타인을 만날 수 있을까. 새로운 타인의 얼굴을 보면서 새로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신호를 타전할 수 있을까. 안무가 정영두는 그러한 대안적인 발상들을 잠시 치워놓는다. 그런 성급한 대안은 통속적인 일반화에 그칠 뿐이며, 오히려 그리움의 고유한 질감을 충분히 맛보기를 권한다. 그 그리움이 침묵의 언어로 말하는 것을 충분히 느껴보기를 권한다. 그리움 스스로가 가는 길을 열 것이고, 그때의 그리움은 동일자와 타자를 갈라놓는 폭력보다는 타인의 얼굴에서 발견하는 기억과 그리움을 통해 이해의 방법을 깨우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예정된 프로그램이 아니라 자발적이면서도 우연적인 프로그램이다. 자명하지 않은 사건으로서의 그리움은 정영두가 발군의 디테일로 포착해낸 몸짓언어와 그 조합이 낳는 정서적 효과로 인해 증폭되고 은근하게 이어진다. 사적 기억이 기억 자체로 그치는 게 아니라 타인과의 연결이란 윤리학적 물음을 던지면서 비로소 기억은 기억다워진다. 고립된 기억이 아니라 그리움의 그물로 확장되는 기억이 된다. ‘나의 기억’이라는 ‘푼크툼’(롤랑 바르트)이 곧 ‘너의 기억’이란 차이를 만나면서 비로소 그리움의 좁은 영역을 벗어나 관객들의 마음에까지 공명현상을 선물한다. 타인의 기억을 통해 자아의 내면을 돌아볼 수 있는 소중한 기회가 된 공연이다.
/김남수 무용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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