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토벤 심포니 이후 관현악의 역사는 리스트의 표제음악과 브람스의 절대음악이라는 두 갈래 길을 걸었다.
전자가 음악외적 스토리나 화려한 관현악색채를 추구했다면, 후자는 순수한 음의 내적 관계에 치중했다.
지난해 베토벤 심포니 전곡연주를 마친 서울시향이 올해 브람스를 택했다는 것은 화려한 겉멋에 젖지 않고 음악 자체에 충실하겠다는 선언이나 다름없다.
섣불리 대곡에 도전하지 않고 오케스트라의 기초체력 단련에 힘쓰겠다는 예술감독의 의지가 담긴 것이다.
과연 정명훈의 선택은 옳았다. 9일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브람스 스페셜 첫 연주회에서 서울시향은 브람스 심포니의 꽉 짜여진 구조와 대위법의 그물망을 한층 더 능숙하게 해독해냈다.
비록 세부적으로는 잘 다듬어지지 않은 부분이 많았지만, 서울시향의 앙상블은 지난해에 비해 더 안정되어 있었고, 무엇보다도 적극적인 표현 의지가 나타난 진지한 연주자세가 무척 인상적이었다.
짧은 연습 기간 이 정도의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확신에 찬 지휘로 단원들의 신뢰를 이끌어낸 정명훈의 음악적 고집 덕분이리라.
브람스 스페셜은 축제 분위기로 시작됐다. 브람스의 관현악곡 가운데서도 가장 가볍고 명랑한 대학축전서곡은 자칫 무거워지기 쉬운 브람스 음악회의 긴장감을 풀어주는 적절한 오프닝이었다.
첼로 수석주자의 능숙한 리드 하에 첼로 12대와 콘트라베이스 10대가 편성된 육중한 저음현이 결코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모습은 무척 인상적이었다.
이어서 연주된 브람스의 바이올린협주곡에서 그리스 출신의 바이올리니스트 레오니다스 카바코스는 신들린 듯한 연주로 특별한 감흥을 선사했다.
악기를 완벽하게 통제하고 조절하는 그의 테크닉은 경이로웠다. 1악장 첫 도입부에서부터 빛을 뿜어내듯 찬란하게 폭발하는 바이올린 음색은 처음부터 관객의 귀를 사로잡았으나, 초반에는 다소 느리게 설정된 오케스트라의 템포와 독주자의 타이밍이 약간씩 어긋나 음악적 흡인력이 떨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카바코스는 협연이 진행되는 동안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주의 깊게 듣고 오케스트라의 제1바이올린 파트를 함께 연주하기도 하면서 점차 오케스트라와 조화를 이루기 시작했다.
음악적 안정을 찾은 카바코스는 1악장 카덴차를 지나, 2악장, 3악장으로 갈수록 점차 음악에 몰입해가며 좀 더 자유로운 표현을 시도했고, 3악장에서는 즉흥적인 장식음을 첨가하거나 악센트를 더욱 강조하는 등 도취적인 연주를 들려주었다.
안타까웠던 것은 오케스트라가 카바코스의 신들린 연주를 제대로 따라주지 못했다는 것. 목관의 불안한 음정도 문제였지만, 독주자의 음악을 듣고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순발력이 많이 부족했다. 독주자와 충분한 연습 시간을 갖지 못했던 것도 원인이 되었으리라 추측해본다.
협주곡이 끝난 후 카바코스는 청중의 열광적인 환호에 답해 앙코르 곡으로 타레가의 '알함브라 궁전'을 연주했다.
본래 기타로 연주되는 이 곡을 바이올린으로 연주한다는 것 자체가 거의 불가능한 일임에도, 그는 활을 자연스럽게 튀어 오르게 하는 리코셰 주법을 이용해 이 곡을 능란하게 연주해 경탄을 불러일으켰다.
휴식 후 이번 음악회의 하이라이트인 브람스의 교향곡 제1번이 연주됐다.
이 곡은 베토벤 심포니의 전통을 가장 충실히 계승한 교향곡으로서 베토벤 풍의 집요한 리듬반복을 통한 추진력이 핵심이다.
정명훈이 이끄는 서울시향은 1악장 도입부에서부터 팀파니의 타격을 중심으로 상ㆍ하행으로 벌어지는 대위구조의 긴장감을 팽팽하게 유지하며 음악적 추진력을 쌓아나갔다.
목관을 더블로 편성하고 현악 파트를 보강한 서울시향은 세종문화회관의 열악한 음향환경에서도 중후한 사운드를 뿜어냈다. 음 하나하나를 물고 늘어지는 뒷심은 약간 부족했지만, 음악에 대한 집중력은 대단했다.
이 심포니의 핵심인 4악장에서 지휘자 정명훈은 고통에서 환희로 향하는 이 교향곡의 드라마를 최대한 부각시킨 해석으로 설득력을 얻었다.
다만 부분적으로 각 파트별로 아티큘레션이 부정확하거나 관악기들의 어택이 일치하지 않은 경우도 있었으나, 음악적 갈등을 해소하는 호른 솔로도 훌륭했고, 비교적 담담하게 연주된 현의 주제는 기품이 있었으며, 클라이맥스로 향해가는 음악적 추진력은 폭발적이었다.
브람스 스페셜의 출발은 훌륭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지금의 진지함과 적극성을 유지하며, 오랜 기간 인내심을 갖고 서울시향의 사운드를 차근차근 다듬어나가는 것이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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