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브’, 그저 일곱살 정신연령을 지닌 상은이(강혜정 분)와 아픈 딸을 두고 눈 감아야 하는 엄마(배종옥 분)가 관객의 눈물샘을 지독히 자극하는 영화겠거니 했다.
오해였다. 장편영화가 겨우 두 번째인 허인무 감독, 관객 울렸다 웃기는 재주가 보통이 아니다. 눈가를 휴지로 콕콕 찍고 있는 사이 난데없이 웃음 폭탄을 날려 깔깔 웃게 만든다. 울려도 ‘질질 짜도록’ 하는 게 아니라 깔끔하고 상큼한 눈물을 뽑아 낸다.
‘허브’의 눈물 제조법
3일 저녁 9시 서울 종로 필름포럼에서 열린 일반시사회 관객이 처음 눈물을 쏟은 부분은 종범이 오빠(정경호 분)에게 첫눈에 반한 상은이가 실연했을 때다. 감당키 어려운 상처로 힘겨워 하는 상은이가 시리고 먹먹한 가슴을 흰밥으로 채우는 장면이 보는 이를 울렸다.
또 하나, 죽음이 뭔지도 모르는 상은이가 세상 속 유일한 버팀목인 엄마의 죽음을 통해 인생의 큰 비밀인 죽음에 대해 알아가고, 엄마와의 이별을 받아들이며 성장해가는 모습은 가슴 저리다.
상은이가 사랑에 대해 알아가고,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과정이 눈물 공장의 제조 라인이다. 물론 이를 가능케 하는 것은 정말 일곱살처럼 보이는 강혜정의 호연과 탄탄한 연기력의 배종옥이다.
‘허브’의 웃음 제조법
영화 ‘허브’에는 정신지체 상은이 외에도 좀 엉뚱한 인물이 한 명 더 있다. 바로 상은이의 사랑, ‘꼴통’ 공익요원 종범이 오빠다. 원인은 다르지만, 사람과 세상에 대해 솔직하게 반응하는 두 사람의 모습은 겉치레를 아는 평범한 우리들이 보기엔 좀 모자라고 엉뚱하게 비쳐 웃음을 자아낸다.
그리고 웃음을 논하며 빼놓을 수 없는 두 사람이 영란이, 승현이다. 허인무 감독의 전작 ‘신부수업’의 하지원과 권상우를 어린 시절로 옮겨놓은 듯, 승현이는 극중에서 신부님으로 불린다. 상은이가 정신연령 일곱, 육체나이 스물이라면 영란이는 그 반대다. 보통 영화에선 어른들이 소화할, 세상 다 산 듯한 대사들을 내뱉는 두 아이의 모습은 ‘우리의 자화상인가’ 뜨끔하기에 앞서 커다란 웃음을 선사한다.
누가 ‘바보’라고 하면 꽉 물어버리는 상은이, 허브를 좋아하다 못해 화투 흑사리 껍데기에 집착하는 설정도 불쑥불쑥 튀어나와 웃음을 생산한다. 반복 재생으로 인한 식상함과 지루함 없이, 적절한 타이밍에 맛깔스런 양념으로 사용했다.
정신지체아의 유쾌한 성장기
영화의 내용은 이렇다.
꿈에 그리던 ‘왕자님’ 종범 오빠를 발견한 상은이, 상은이가 국제변호사인 줄 아는 종범. 오해로 시작된 종범의 사랑은 모진 이별을 고하는 듯하더니 상은이의 순수함에 이끌려 다시 돌아온다.
그러나 종범을 결사반대하는 이가 있었으니 상은이의 엄마다. 모자란 딸을 혼자 두고 가느니 누군가 곁에 세워두고 가는 게 낫지 않느냐고 생각할 수 있겠다. 천만의 말씀이다.
상은이에 대한 종범의 마음을 순수하게만 볼 수 없는 엄마는 사내의 불장난에 딸이 상처 입기보다는 꿋꿋하게 홀로서기를 바라기에 이별을 종용한다. 상은이는 세상을 떠나는 엄마 말을 들어야 할까, 처음으로 찾아온 사랑을 택해야 할까. 뻔한 듯하지만, 다소 의외의 답이 숨겨져 있다.
둥글둥글한 돌들이 만드는 합주
‘허브’에는 배종옥을 비롯해 이원종, 이미영 등의 중견 연기자들이 출연한다. 강혜정과 정경호에 비하면 대선배인 이들은 연기력 자랑을 하거나 극적인 표현을 앞세워 튀지 않는다. 모두가 편안하고 여유롭게 보인다. 기본기를 갖춘 배우답게, 제 자리에서 제 몫을 해내며 영화의 큰 바퀴를 돌린다.
이들이 굴리는 마차에 타고 있는 건 강혜정과 정경호다.
몸은 스무살, 정신은 일곱살. 강혜정이 만들어낸 상은이는 정말 그렇게 보인다. 표정이며 말투, 목소리까지 감탄스럽다. 상은이가 종범 오빠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가출을 고민하는 순간 등장하는 장화홍련, 백설공주, 신데렐라, 잠자는 숲속의 공주 등의 캐릭터는 모두 강혜정이 1인 다역으로 소화했는데 재미있는 볼거리다. 특히 ‘혀 꼬부라진’ 인어공주 연기는 압권이다.
정신지체아를 스크린 위에 만들어내는 정극 연기에서 배꼽 쥐게 하는 코믹연기까지 소화하는 그녀를 보노라면 혀가 내둘러진다. 배우들은 나날이 발전하길 바란다는데, ‘다음 번에 더 잘 할 수 있을까’ 강혜정의 차기작이 괜스레 걱정될 정도다.
‘폭력 써클’에 이어 배우로서의 이미지를 각인시킨 정경호의 안정감 있는 연기와 맑은 미소도 ‘허브’의 매력이다. 상은이가 부딪히는 사회의 벽들에 그녀보다 더 울고 웃는 종범의 모습은 상은이 뿐 아니라 뭇 여성들의 ‘왕자님’이 되기에 충분하다. 상은이를 괴롭히는 폭력녀들을 보며 ‘저녁 밥상에 올라있어야 할 깻잎 반찬들’이라고 거침없이 칭하는 것처럼 영화 곳곳에서 선보이는 유머감각도 유쾌하다.
정신지체아 3급 상은이의 가슴 벅찬 첫사랑, 엄마와의 이별을 통해 어른으로의 성장통을 그린 영화 ‘허브’는 11일 개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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