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기자시사회가 아닌 일반시사회를 찾는다. 영화에서 보여지는 대로 자신이 느끼는 대로 웃고, 걱정하고, 화내는 관객들의 반응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어서다.
일반시사회 관객들 큰 박수
15일 밤 9시 영화 ‘해바라기’를 관객들과 함께 봤다. 영화가 상영되는 내내 김래원의 연기에 대한 관객들의 호응이 컸다.
10년 수감생활로 세상과 격리된 탓에 사회적응력이 떨어져 다소 덜떨어져 보이는 태식의 순박함에 웃고, 가족들과 조용하게 살고 싶은데 가만 놔두지 않는 어둠의 세력에게 화를 내고, 문득문득 고개를 드는 살기를 누르기 위해 무던히도 참고 당하는 태식을 안쓰러워 하고, 끝내 분노가 터지자 함께 눈물 짓는다.
김래원이 오태식인지, 오태식이 김래원인지….
데뷔 9년차 김래원의 연기에 물이 올랐다.
드라마 ‘옥탑방 고양이’, 영화 ‘어린 신부’ 류의 귀여움과 낭만을 떨치고 변신을 꾀했던 ‘미스터 소크라테스’의 연장선 정도겠거니 하는 섣부른 판단은 금물이다.
똑같은 양아치지만, 그저 그렇게 단순하고 전형적인 양아치 연기가 아니다. 오태식이 김래원인지, 김래원이 오태식인지…. 연기를 하는 주체와 표현 대상이 된 객체 사이에 놓인 경계가 무너질 만큼 몰입했다. 진정성 강한 김래원의 연기는 태식 캐릭터와 영화의 리얼리티를 높이고 관객의 마음에 뭉클한 감동을 전한다.
강산도 변한다는 10년. 김래원은 오랜 수감생활로 변해도 너무 변한 세상에 탄력있게 대응하지 못해 모자라 보이는 태식, 그럼에도 예전처럼 주먹이 아니라 순종과 인내로 문제를 해결하려 애쓰는 태식을 스크린 위에 ‘생생하게’ 만들어 낸다. 선 굵은 얼굴과 단단하고 사내다운 느낌을 지우고 어리숙한 표정과 티없이 맑은 웃음으로 관객 앞에 우뚝 섰다.
뻔한 스토리, 뻔하지 않은 영화
과거 주먹계의 전설이었던 태식이 10년 간의 수감생활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온다. 그의 심장 쪽 주머니엔 ‘희망수첩’이 들어있다. 다시는 싸우지 않겠다, 다시는 술을 마시지 않겠다, 다시는 울지 않겠다….
사실 ‘해바라기’의 스토리는 뻔하다. 오랜 시간 눈물로 참회하며 결심한 대로 원수를 양아들로 받아들여준 어머니, 목숨을 걸고라도 지켜주고 싶은 주희와 행복하게 살고 싶은 그를 세상은, 그의 재기가 두려운 조폭들은 가만두지 않는다. 태식이 결국 가족을 위해 다시 피바람을 일으킬 것이라는 결말은 영화 시작부터 보인다.
뻔한 결말을 뻔하지 않게 하는 데에 배우 김래원과 강석범 감독이 있다.
어딘가 멍청하고 순박한 사회부적응자의 모습과 순간순간 번뜩이는 살기어린 태식을 오가는 김래원의 연기는 극에 탱탱한 긴장감을 부여한다.
로맨틱 코미디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일이 생기면 틀림없이 나타난다 홍반장’의 각본·감독, 코미디 ‘투사부일체’의 각본을 담당했던 강 감독. 코미디에 일가견이 있는 작가답게 이번에도 맛있고 재밌는 대사를 곳곳에 포진시켜 무거워진 분위기를 밝게 환기시키는가 하면, ‘코미디 영화도 아닌데 너무 재밌는거 아냐’ 싶으면 코끝을 찡하게 한다. 관객의 마음을 쥐락펴락하는 연출 솜씨가 여간 아니다.
조연들의 호연도 한몫
여기에 ‘열혈남아’의 나문희 처럼 사내의 폭력성을 순화시키는 모성애의 표상으로 등장한 어머니 김해숙, 신인답지 않게 당찬 발랄함과 따뜻함을 동시에 표출시키며 김해숙과 김래원 사이에서도 기죽지 않은 허이재. 두 여배우가 김래원의 양어깨에서 제몫을 단단히 해냈다.
그 밖에도 악랄한 연기의 진수를 보여주는 조판수 회장 역의 김병옥, 조폭이라고 죄다 무식하다는 편견은 버리라고 항변하듯 차분히 넘버2 양기를 연기한 김정태, 시대가 바뀌어도 조폭은 단순과격해야 제맛이라며 양기와 대립각을 그리는 정수 역의 이창무까지 조연들의 감칠맛 나는 연기가 극의 재미를 돋운다.
조폭 영화의 ‘패러다임 쉬프트’
‘해바라기’는 어딘가 ‘열혈남아’와 닮아 있다. 두 영화 모두 건달이 주인공이지만 기존의 조폭영화와는 분명하게 선을 그은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과거의 조폭영화들이 낭만이나 추억으로 폭력을 미화하며 무분별하게 스크린에 피를 뿌렸다면, 두 영화는 죽여야 하는 원수의 어머니(열혈남아), 내가 죽인 사람의 어머니(해바라기)의 정 속에서 자신의 무차별 폭력의 정당성에 대해 고민한다.
결국 폭력의 칼날은 무뎌진다. 폭력보다 강한 모성, 두 영화는 모성을 통한 폭력의 자기 반성을 시도한다. 이러한 새로운 기류가 한국영화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 주목해볼 일이다.
김래원 앞에 명실상부하게 ‘배우’라는 수식어를 훈장으로 달아줄 영화 ‘해바라기’는 23일 개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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