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리뷰> 상트페테르부르크필하모닉 내한공연

7-8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린 상트 페테르부르크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내한공연은 공연 진행과 연주력에 있어 격차가 현저한 무대였다.

첫째날 프로그램은 베버의 '오이리안테' 서곡과 한국인 피아니스트 김원의 협연 무대(그리그 협주곡),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5번으로 이루어졌다.

독일에서 활동 중인 김원은 공급 부족에 시달리고 있는 한국인 30대 남성 피아니스트 중에서도 선두주자에 속하는 아티스트다. 그러나 이날 그의 피아노는 안타깝게도 오랜 전통의 오케스트라의 벽을 넘어서지 못했다.

사실 몇 십 명의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한 가운데 피아노를 유난히도 가까이에서 빼곡하게 둘러싼 무대 지형도는 이미 그 자체만으로도 협연자가 지고 갈 부담을 예상케 하기에 충분했다.

김원의 연주는 깔끔하고 모범적이었으며, 특히나 정확성에 있어서는 아쉬울 바 없을 만큼 탁월했지만, 서정적인 정서는 이런 점들에 비해 솔리스트로부터 정당한 배려를 받지 못했다.

결국 그리그 협주곡에서 기대할 만한 북구의 광활한 정서라든가 내재되어 있는 멜로디 라인은 오케스트라를 통해서만 발현되었을 뿐, 위축된 피아노가 개입할 때 마다 그리그가 작품 안에 심어놓은 노래와 스케일은 개화되지 못한 채 답답하게 닫힌 꽃봉오리로 시들어버리고 말았다.

2부에 연주된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5번은 3년 전 내한공연에서 청중들에게 깊은 감명을 던져주었던 프로그램이었다.

그러나 당시 모두를 열광케 했던 튼실한 현악 파트의 호흡이라든가 비단실처럼 부드러웠던 목관, 탄력 있던 리듬감을 비교할 때, 이번 연주는 호연이긴 했지만 약간의 엉성함으로 2%의 아쉬움을 남겼다.

특히 호흡곤란마저 유발시켰던 목관의 투박한 울림은 이 교향곡이 가진 감성에 치명적인 상처를 남겼다.

그러나 다음날 공연에서 지휘자 테미르카노프는 이 모든 상황을 훌륭하게 반전시켰다. 전날과 동일한 무대 배치 속에 블라디미르 펠츠만에 의해 연주된 차이코프스키 협주곡 1번은 오케스트라를 훌륭하게 대적함을 넘어서 멋지게 압도했다.

1악장에서 같은 클래스메이트였던 테미르카노프의 오케스트라 반주와 다소의 신경전을 벌였던 펠츠만은 더 이상은 있을 수 없는 완벽한 테크닉과 카리스마, 변화무쌍한 음색으로 결국 후반 카덴차에서 오케스트라를 굴복시키는 데 성공했다.

2악장과 3악장은 완벽한 피아노만의 독무대였으며, 테미르카노프는 기분 좋게 체념한 독재자의 표정으로 피아니스트에게 90%의 주도권을 넘겨주었다.

2부에 연주된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5번은 애초에 이 악단이 이 작품 하나에 모든 초점을 맞추고 음색을 조율해서 찾아왔다는 것을 여실하게 확인시켜 준 호연 중의 호연이었다.

불과 보름 전 찾아와 동일한 곡을 연주했던 BBC 심포니와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연주는 차원이 달랐다.

BBC 심포니가 구사했던 다채로운 음향효과, 다이내믹, 완벽한 앙상블을 월등히 넘어서 상트 페테르부르크 필하모닉은 치열한 시대정신을 전파하며 이 교향곡의 본래 주인임을 천명했다.

화려하고 날렵한 지휘 테크닉을 선보였던 테미르카노프의 두 손이 보다 진중하고 간결하게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1악장 도입부에서 시작된 불길한 정서는 승리의 행진으로 마무리되는 4악장 마지막 순간까지도 거두어지지 않은 채 이 작품의 무게를 지탱해주고 있었다.

BBC 심포니가 유머와 익살로 치장했던 2악장 스케르초에서 조차 이 러시아 악단은 몸서리가 쳐질 만큼 비극을 담았으며, 그 어느 누구도 이의를 달지 못했다. 고무줄처럼 최대한 팽팽하게 당겨지고 늘어진 싱코페이션과 템포는 극단의 긴장을 유발했다.

전날 차이코프스키 교향곡에서 유달리 튄다고 생각되었던 바이올린 악장의 솔로, 플루트의 투박한 음색은 쇼스타코비치 교향곡의 정신을 구현하는 데 최고 수훈 공신이었다.

승리의 피날레를 완성 지은 후 객석 쪽으로 몸을 돌린 테미르카노프와 단원들의 새빨개진 얼굴에는 성공적인 연주에 대한 기쁨보다도 마치 국가를 부르고 난 것처럼 자부심과 비장함이 어려 있었다.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은 음악으로 쓰인 러시아 역사다"라고 테미르카노프는 내한 직전 인터뷰에서 언급한 바 있다. 세대가 바뀌고 포디엄의 주인이 바뀌었지만, 같은 시대를 살고 역사를 개척했던 이 악단에 아직도 작곡가의 호흡이 잔류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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